[김진홍 칼럼] 좀 더 겸손한 국정운영을

입력 2017-10-15 17:24

추석 연휴 직후 문재인 대통령이 결정한 김이수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 체제 유지의 여진이 지속되고 있다. 지난 13일 헌재에 대한 국회 법사위의 국정감사는 이 문제로 인해 파행됐다. 김 권한대행이 자진사퇴해야 한다는 주장마저 나왔다. 문 대통령이 지난 5월 청와대에서 김 권한대행을 헌재소장 후보자로 발표한 당시엔 형식도, 내용도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김 후보자 임명동의안은 지난달 11일 국회에서 부결됐다. 헌정사상 첫 헌재소장 후보자 인준안 부결이다. 국민 대의기관인 국회에서 ‘부적격 판정’을 받은 것이다. 새 헌재소장 후보자를 조속히 지명하겠다는 말 대신 ‘부적격’ 인물에게 앞으로 11개월여나 헌재를 계속 맡기겠다니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은 물론 국민의당에서도 국회를 무시한 처사라는 등의 비판이 나오는 건 당연지사라 하겠다.

청와대는 뒤늦게 헌법재판관 9인 체제가 구축되고, 국회에서 헌재소장 임기를 명확히 정하는 입법을 마치면 헌법재판관 중에서 헌재소장 후보자를 지명하겠다고 했다. 헌재소장 임기와 관련한 규정이 없는 탓에 신임 헌재소장은 임기 6년을 보장해야 한다는 해석과 헌법재판관 잔여 임기 동안만 헌재소장을 맡는 게 옳다는 쪽이 병존하는 상황을 국회에서 먼저 정리해달라는 주문이다. 국회에 볼을 넘긴 셈이다. 국회에서 빨리 관련 규정을 만들어달라는 요구인 동시에 국회에서 입법이 안 되면 ‘김이수 지도체제’로 가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뜨뜻미지근하다.

여기에서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다. 문 대통령이 헌재 권한대행 체제 유지를 결정한 날 언급한 추석 민심이 그것이다. 문 대통령은 수석비서관·보좌관 회의에서 추석기간 민생과 개혁을 속도감 있게 추진하라는 엄중한 민심을 재확인했다고 말했다. 또 “적폐청산은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왠지 허전하다. 안보와 경제 불안을 걱정하는 소리, 과거사 전쟁 대신 미래 먹거리를 찾는데 진력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듣지 못했는가라는 생각 때문이다.

이런 우려는 대통령이 추석 연휴 때 지지자들만 만난 건 아닐까라는 데로 이어진다. 대통령을 열렬히 지지하는 이른바 ‘문빠’는 김이수 인준안 표결 직전 국회의원들에게 가결을 촉구하는 문자폭탄을 보낸 바 있다. 결국 좌절됐지만, 그들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위무하려는 의도가 김이수 대행체제 유지의 한 요인으로 작용한 게 아닌가 싶다. 헌재에 대한 국회 법사위 국감이 파행으로 끝난 직후 온라인에 김 권한대행을 응원하는 글들이 쏟아지자 문 대통령이 페이스북을 통해 국회를 꾸짖으며 호응한 점도 이런 시각을 뒷받침한다.

정치보복 논란에도 문 대통령이 적폐청산을 재차 강조한 점 역시 지지자들을 염두에 둔 면이 없지 않아 보인다. 현 정부 지지자들 대부분은 이명박·박근혜정부 9년을 청산해야 할 적폐로 여기고 있고, 이에 발맞춰 청와대가 중심이 돼 검찰과 국정원 국세청 국방부 등에서 이명박·박근혜정부 적폐를 끊임없이 내놓고 있다. 대통령 비서실장은 법원의 박 전 대통령 구속 연장 결정 하루 전날 청와대에서 직접 마이크를 잡고 세월호 최초 보고시간 조작 문건을 발견했다며 ‘참담한 국정농단’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미 처참하게 무너져 역사의 뒤안길로 들어선 박근혜정부에 대통령 비서실장이 다시 맹공을 퍼부은 것이다. 현 정부가 전(前)·전전(前前)정부와의 싸움에 너무 힘을 쏟는 것 같다.

지지자들을 무시할 만큼 두둑한 배짱을 가진 집권세력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환호에 안주하면 오만과 독주, 불통의 부작용이 생기기 마련이다. 불행했던 역대 정부들이 주는 교훈이요, 현 집권세력이 명심해야 할 부분이다.

지난 대선 결과를 보면 더욱 그렇다. 19대 대선 투표율은 77.2%였다. 문 대통령은 여기에서 41.08%를 얻었다. 2위 후보와의 표차는 역대 최다다. 전국 17곳 광역시·도 중 14곳에서 1위를 차지해 ‘전국 대통령’이라는 평가도 나왔다. 하지만 총 유권자 수로 계산하면 문 대통령 득표율은 31.6%다. 68% 정도는 문 대통령에게 표를 주지 않은 셈이다. 전체 유권자 대비로 환산하면 문 대통령 득표율은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박근혜 전 대통령보다 낮고, 이명박 전 대통령보다는 높다. 박근혜 탄핵과 촛불정국으로 뜨거워진 표심, 사전투표제 도입, 오후 8시까지의 투표 시간, 임시공휴일 지정 등을 감안하면 압승을 거둔 건 아니다.

문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다. 저를 지지하지 않은 국민 한분 한분도 저의 국민, 우리의 국민으로 섬기겠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을까.

김진홍 논설실장 jh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