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초동수사는 부실한데… ‘국감대응’엔 민첩한 서울경찰청

입력 2017-10-12 19:11 수정 2017-10-12 22:44
서울경찰청에서 국정감사에 대비해 작성한 문건 표지와 목차. 김정훈 서울경찰청장이 결재한 이 계획서에는 국감 준비 중에도 직원들의 사건·사고가 없도록 관리감독을 철저히 하고 이후 유공자를 선별해 포상도 실시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서울경찰청이 국정감사 질의 시나리오와 참석 위원 질의 순서 정보 등을 사전에 입수해 ‘국감 즉응태세’를 갖추라는 문건을 만들어 전파한 것으로 12일 확인됐다. 이를 위해 정보 경찰관들을 동원토록 했다. 이 문건은 지난달 기안돼 김정훈 서울경찰청장의 결재까지 받았다.

서울경찰청이 제작한 ‘2017년 국정감사 수감 대비계획’ 문건을 보면 정보1과 정보2계는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위원들의 질의 내용을 미리 입수해 경무과 기획예산계로 통보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서울경찰청 국감은 17일 오후 2시부터 열릴 예정이다. ‘질의 시나리오는 통상 수감일 이틀 전(15일)부터 입수되기 시작해 전일(16일)에 본격적으로 입수. 동(同)기간 기능별 대비체제 유지’라고 문건에 적혀있다. 기획예산계가 취합한 위원별 시나리오는 해당 부·과로 전파돼 사전 답변서를 작성한 뒤 서울경찰청장에게 보고하는 절차를 밟도록 했다.

국감을 받는 도중에 질의 시나리오를 입수한 경우에는 해당 부·과에서 즉시 답변서를 만들어 국회 대책요원(기획예산계 소속)에게 제출하라는 지침도 내려졌다. 서울경찰청은 “과장급의 답변서 참여 등 즉응태세를 확립할 것”을 강조했다. 국감 당일 참석위원 명단 및 질의순서 등 파악·통보도 현장에 지시된 사항이었다. 문건에는 ‘질의 순서 입수 시 위원별 시나리오 답변서를 순서에 맞게 정리’ ‘정보1과장은 참석위원 명단 및 질의순서 등 파악, 통보’ 등의 지침도 담겼다. 국감 현장 상황은 1보, 2보 식으로 매시간 경찰청 및 국무총리실에 보고하라며 보고서 양식까지 하달됐다. 서울경찰청 인사교육과장은 국감 후 유공자들에게 포상을 실시하라는 지시도 있었다.

경찰 관계자는 “국회의원들이 국가에서 어느 방향으로 질의할지 대비하고 정확히 대응하려면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며 “어느 부처에서나 이렇게 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피감기관들이 나름의 대관 정보망을 활용해 국감에서 의원들이 추궁할 내용들을 입수하고 예상 질의·답변서를 준비하는 건 관행적인 측면도 있다. 충실한 국감 준비를 위한 절차로도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피감기관 차원에서 단순히 기관 수장의 망신을 막거나, 수월한 국감을 위해 사실상의 대본을 만들어 대응하려 하면 보여주기식 국감에 그칠 수 있다는 우려가 많다. 과거 피감기관과 일부 위원이 국감 전 대책회의까지 연 사실이 폭로돼 국감이 파행된 전례도 있다.

피감기관 실무자들로서는 미리 질의서를 입수하기 위해 뛰어야 하고, 이후에는 답변서 작성에 과중한 업무를 부담해야 하는 실정이다. 여러 피감기관 관계자들이 “자료제출 요구 관행이 개선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사전 시나리오와 답변서를 갖고 시작된 국감은 정쟁의 장으로 비화되기 일쑤다. 13일 헌법재판소 국감을 두고 야당 측이 청와대의 헌재소장 권한대행 체제 유지 방침에 반발해 보이콧을 검토하는 등 올 국감도 곳곳에서 파행 조짐을 보이고 있다.

신훈 윤성민 기자 zorb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