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 스페셜] ‘욱’하는 성격의 김정은, 치킨게임 이면엔 치밀한 ‘계산’
입력 2017-10-11 05:00
"정은 대장(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후계자가 되더라도 간단히 핵에서 손을 떼지 않을 것이다."
일본인 요리사 후지모토 겐지는 2010년 저서 '북한의 후계자, 왜 김정은인가?'에서 이렇게 내다봤다. 1982년 처음 입북한 그는 1989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전속 요리사가 됐으며 2001년 탈북할 때까지 김씨 일가의 최측근으로 지냈다. 이 시기 후지모토는 김정일의 셋째 부인 고용희 소생인 정철·정은·여정의 유년기 놀이동무였다.
후지모토는 “김정일과 달리 정은 대장은 어릴 적부터 유럽 등지의 서방사회를 직접 보고 자유로운 사회를 피부로 체험했다. 외국에서는 어디를 가도 상점에 물건이 넘쳐나는데 자국은 그렇지 않다는 것, 북한 체제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그러면서도 “핵 보유는 미국 등의 핵 공격을 봉쇄하는 억제력이 된다는 신념이 김정일에게 있었다. 그런 사고방식은 정은 대장이 후계자가 되더라도 쉽게 버릴 수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후지모토의 예측은 얼추 들어맞았다. 김정은은 민생경제에 각별히 신경 쓰는 모습을 보여주며 ‘애민 지도자’ 이미지를 만들고 있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경제 발전의 최대 걸림돌인 핵은 결코 포기하지 않고 있다. 해외 물정에 밝은 김정은의 개인사와 무관하게 핵은 북한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만능의 보검’이 됐다.
북한이 핵 개발을 시작한 것은 70년대 말이지만 체제의 명운을 걸고 필사적으로 매달린 것은 90년대 초다. 북한은 최우방국이었던 구소련과 중국이 남한과 수교를 하면서 자신과의 외교 관계를 격하하자 극심한 위협을 느꼈다. 철저한 고립 상태에서 경제적으로 훨씬 부유하고 미국의 동맹국인 남한을 상대하려면 핵 외에는 대안이 없었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때 한·소, 한·중 수교와 함께 북·미, 북·일 수교가 이뤄졌다면 북한의 안보 불안감이 자연히 해소되면서 북핵 문제는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하지만 당시 노태우정부는 북·미, 북·일 간 직접 접촉을 막았다. 전향적 대외 전략으로 평가받는 ‘북방정책’을 추진했던 노태우정부조차 남북대결 의식만은 극복하지 못한 것이다. 한반도 주변국들은 2005년 북핵 6자회담 9·19 공동성명에서 북·미, 북·일 관계 정상화를 약속했지만 지금은 성명 자체가 사문화된 상태다.
북·미가 제네바 합의를 도출한 1994년부터 마지막 6자회담이 열린 2008년까지 북한이 진지하게 핵을 포기할 의사가 있었는지를 두고는 논쟁이 분분하다. 반면 이 시기 이후에 북한이 핵 보유로 방향을 확고히 했다는 데는 별다른 이견이 없다. 북한이 태도를 바꾼 이유로는 우선 김정일의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면서 후계 문제가 본격화됐기 때문이다. 김정일 건강 문제가 대외적으로 알려지면서 ‘북한 붕괴론’이 성행한 것도 북한의 위기감을 자극했을 수 있다.
2010년대 들어 발생한 국제정치적 사건들은 북한의 핵 보유 의지를 더욱 굳히게 한 것으로 추정된다. 2003년 핵을 포기해 한동안 북한의 ‘모범 사례’로 통했던 리비아의 무아마르 알 카다피는 2011년 시민혁명 때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핵 포기 대가로 리비아와 관계를 정상화했던 서방 국가들은 ‘민간인 보호’를 명분으로 카다피의 군대에 폭탄을 퍼부었다. 김정은을 필두로 한 북한 지도부에게는 섬뜩하게 들릴 만한 일이다. 미국과 영국, 러시아의 안전보장을 믿고 1994년 구소련제 핵무기를 포기했던 우크라이나가 20년 뒤인 2014년 러시아에 크림반도를 빼앗긴 것도 북한에는 ‘반면교사’다. 북한이 리비아와 우크라이나 사례를 목격한 뒤 더욱 핵에 집착하고 있다는 게 국내외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김정은은 김일성·김정일로부터 핵을 체제유지 수단으로 보는 인식을 물려받았다. 그러면서도 구체적인 협상전략에서는 선대의 ‘벼랑끝 전술’을 뛰어넘은 ‘미치광이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김정은은 지난해부터 핵·미사일 도발 빈도와 강도를 역사상 전례 없는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김정일 시대에 암묵적으로 통용됐던 ‘핵실험 3년 주기’는 김정은이 지난해 1월과 9월, 올해 9월 등 2년도 안 되는 기간에 세 차례 핵실험을 하면서 깨졌다.
태영호 전 주영 북한공사는 지난해 망명 직후 기자회견에서 “김정은은 2017년 말을 핵 개발 완성을 위한 시간표로 정했다”면서 “한국과 미국에서 대선이 열리는 2016∼2017년 사이에 핵을 무조건 완성하겠다는 광신적인 목표를 향해 질주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이런 행동은 그가 고모부 장성택 국방위 부위원장과 현영철 인민무력부장 등 고위 간부를 잔혹하게 살해한 것과 맞물리면서 ‘핵 미치광이’ 이미지를 완성했다.
외부세계에 알려진 김정은의 유년기 행실도 이런 이미지를 뒷받침한다. 김정은의 어린 시절은 1990년대 말 ‘박은’ 또는 ‘박운’이라는 가명으로 스위스 베른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때의 몇몇 일화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다. 이명박정부 시절 국가정보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소장을 지낸 남성욱 고려대 교수에 따르면 김정은은 유학 시절 사귀던 여자친구가 “담배를 끊어라”고 잔소리를 하자 심한 욕설을 퍼부었다고 한다. 미국 행정부는 스위스에서 김정은과 만났던 사람들을 면담하고 그의 성격이 ‘매우 위험하고 예측 불가능하며 과대망상이 있고 폭력적’이라고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김정은의 이모 고용숙 역시 “정은이는 성질이 급하고 인내심이 없었다. 어머니(고용희)가 공부하라고 꾸짖으면 말대꾸가 아니라 단식으로 반항했다”고 밝힌 바 있다.
후지모토의 회고도 이런 주장과 들어맞는다. 후지모토에 따르면 김정은은 예닐곱 살 무렵 구슬놀이에서 지자 형인 정철의 얼굴에 구슬을 집어던지며 분노할 정도로 지기 싫어하는 성품이다. 김정은은 지난해 후지모토를 만나 “미국과 전쟁을 할 생각은 없다”면서도 “미국이 무리한 조건만 늘어놓다보니 욱해서 (미사일을) 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가 지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위험천만한 ‘치킨게임’을 벌이는 것도 전략적 판단보다는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성격 때문일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김정은을 광인으로 폄하할 수만은 없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그의 예측 불가능한 행태 이면에는 외교적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치밀한 셈법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한 북한 전문가는 10일 “북한도 국가의 모양새를 갖추고 있고 나름대로의 ‘국가이성’도 있다”면서 “그것은 미국과 전면전을 피하면서 핵 개발을 완성해 세습 독재체제를 지키는 것이다. 김정은의 성격이 어떻든간에 그도 김일성과 김정일로부터 물려받은 북한 최고지도자로서의 역할과 의무를 무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조성은 기자 jse130801@kmib.co.kr, 그래픽=전진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