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의 길목, AI 스피커가 떠오른다

입력 2017-10-10 05:02


손바닥만 한 스피커가 말귀를 알아듣는다. 원하는 음악이나 TV채널을 틀어주고, 일정과 날씨도 알려준다. 한국에서 주로 인공지능(AI) 스피커로 불리는 스마트 스피커 또는 가상개인비서(VPA)용 무선 스피커는 이제 비서 영역을 뛰어 넘어 사람의 친구 자리까지 넘보고 있다. 주요 IT·전자업체들은 AI 스피커 개발·개선에 역량을 집중하는 양상이다.

인공지능 시대 길목에 놓인 스피커

9일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가트너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AI 스피커 시장은 2021년 35억2000만 달러(약 4조135억원) 규모로 성장할 전망이다. 지난해 7억2000만 달러에서 5년 동안 무려 5배 가까이 늘어날 것이라는 예상이다. 베르너 괴르츠 가트너 책임 연구원은 “AI 스피커 업체와 디바이스 종류가 늘면서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우선 스마트폰이 더 이상 성장 가능성 높은 시장으로 평가되지 않으면서 IT업체들이 AI 스피커로 눈을 돌리는 모양새다. 스마트폰 시장의 성장률은 2013년까지만 해도 연 40% 이상 기록했지만 2015년 10%대로 둔화됐고, 지난해에는 3.3%에 그쳤다. 스마트폰이 흔하게 갖고 다니는 물건으로 전락하면서 소비자들은 혁신으로 무장한 다른 전자기기를 원하게 됐다. 그 소유욕을 AI 스피커가 자극하는 중이다.

AI 스피커 시장의 성장세가 가파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여전히 주요 전자기기에 비해선 규모가 작다. 당장 올해 스마트폰 시장 전망치가 4000억 달러에 달한다. AI 스피커의 가격은 대당 100달러대 정도인 반면에 스마트폰의 가격은 1000달러를 웃돈다. 기업들이 눈앞의 수익만 보고 AI 스피커 개발에 뛰어드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단순히 숫자만으로는 AI 스피커 시장의 성장 가능성을 전부 설명하기 힘들다. 이와 관련해 국내 이동통신업계 관계자는 “4차 산업혁명의 핵심으로 꼽히는 AI 기술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가급적 많은 데이터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결국은 음성인식 AI 플랫폼을 선점하기 위한 경쟁이 벌어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용자가 많을수록 AI의 기능은 발전한다. 어느 플랫폼이 더 많은 데이터를 확보했느냐에 따라 소비자의 말을 잘 알아듣고 지시하는 바를 정확하게 이행할 수 있다. 시장을 선제적으로 점령하지 못한다면 도태되는 운명에 직면할 수 있다. 이같은 AI 특성을 온전히 구현할 수 있는 기기가 바로 AI 스피커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집 또는 사무실에서 사물인터넷(IoT) 생태계의 중심 역할을 수행하면서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사용자의 음성, 가전 사용정보 등 데이터를 수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장 선점 노리는 ‘IT 공룡’들

AI 스피커는 처음 등장했을 때 ‘조금 똑똑한 스피커’ 정도로 인식됐다. 2014년 아마존이 첫 AI 스피커 ‘에코’를 출시했을 때 상황이다. 그러나 에코의 AI 플랫폼 ‘알렉사’가 오픈 플랫폼으로 전환되면서 누구나 에코를 이용해 AI 기술을 개발할 수 있게 되자 분위기가 급변했다. 지난해 1월까지만 해도 알렉사를 활용해 개발된 기능은 130여개에 불과했지만 올해 2월에는 1만개를 돌파했다. 에코를 이용하면 아마존 쇼핑도 가능하고, 스타벅스 커피를 주문하거나 우버를 호출할 수도 있다. 미국 완성차 업체 포드는 자동차 시스템에 알렉사를 탑재해 내비게이션과 오디오 등을 음성으로만 제어하는 신제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AI 스피커의 잠재력이 확인되면서 구글도 시장에 뛰어 들었다. 아마존에 비해선 2년이 늦었지만,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검색 엔진을 운영한다는 강점을 내세워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출시된 ‘구글 홈’은 각종 애플리케이션과 연계해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밖에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도 올해 출시를 목표로 AI 스피커를 개발 중이다.

국내에서는 SK텔레콤이 지난해 9월 ‘누구’를 출시했고 KT가 올해 초 ‘기가지니’를 선보이며 시장 쟁탈전을 벌였다. 지난 4월에는 LG전자가 무선랜 기능이 탑재돼 자사의 모든 가전제품과 연동 가능한 ‘스마트씽큐 허브’를 출시했다. 여기에 네이버와 카카오까지 출사표를 던지며 경쟁이 격화됐다. 이에 SK텔레콤은 모바일 내비게이션 점유율 1위를 달리고 있는 자사의 ‘티맵’에 누구를 탑재하며 차별화에 나섰다. LG유플러스는 올해 내로 AI 스피커를 출시할 예정이다.

최근에는 삼성전자의 AI 스피커 개발 계획이 공개되면서 업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삼성전자 윤부근 대표이사 사장은 지난 8월말 독일 베를린에서 ‘IFA 2017’ 개막에 앞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하만과 무선사업부, 생활가전부문이 가진 기술력을 접목한 AI 스피커를 내년에 선보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윤 사장은 “(AI 스피커는) 대충 내놓을 수 없는 제품이기 때문에 시간이 좀 걸리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AI 스피커의 미래는

가트너는 2019년에는 클라우드가 아닌 디바이스 상에서 일부 AI 기능이 구현되는 스피커 제품이 출시될 것으로 전망했다. 또 비슷한 시기에 관광·의료업계 등 전문가용 디바이스에도 AI 스피커 도입이 본격화될 것으로 예상했다. AI가 전문가 영역으로 깊숙이 발을 내딛는다는 얘기다. 란짓 아트왈 가트너 책임 연구원은 “의료분야에서 원격 진단과 노약자 케어 등이 AI 스피커로 구현 가능해질 것”이라며 “의료 생태계 내 파트너 업체들은 하드웨어와 서비스 비용의 일부를 지원해 효율성을 확보하고 도입을 권장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AI 스피커는 일반 소비자들의 거래양상도 바꿀 것으로 예상된다. 아트왈 연구원은 “주문 제작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구성을 탑재한 전문가용 AI 스피커가 2020년 이후 소매 부문에서 상용화 될 것”이라며 “새로운 셀프 서비스형 음성 기반 쇼핑과 결제 경험이 구현돼 기존 오프라인 거래뿐만 아니라 온라인 쇼핑 환경도 바꾸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아울러 가트너는 2020년까지 AI 스피커 제품군에 대한 규제 승인 등을 통해 개인정보 침해에 대한 우려를 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AI 스피커 도입이 확산되면서 개인 디바이스가 사적인 대화를 엿듣고 유출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 바 있다.

유성열 기자 nukuva@kmib.co.kr, 그래픽=이석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