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고세욱] 신태용과 허재

입력 2017-10-09 17:57

“아예 한 골 더 먹혀 싹 다 바뀌었으면 좋겠네.”

7일 밤(한국시간) 축구 국가대표팀이 러시아와의 원정 평가전서 0-4로 점수차가 벌어지자 함께 TV를 보던 아들이 한 말이다. 이후 우리나라가 2골을 만회했지만 아들의 분노는 누그러지지 않았다. 레알 마드리드 팬인 중3 아들에게 한국 국대에 대해 물어보면 대답은 딱 두 가지다. “너무 못해요”와 “(어부지리임에도) 자기들이 잘해서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것으로 안다”이다. 신태용호에 대한 여론의 핵심은 바로 이것이 아닐까. “실력도 없고 염치도 없다.” 그럼에도 대한축구협회는 ‘사심 있는’ 거스 히딩크 전 대표팀 감독 측의 복귀희망 언급에 일부 팬들이 동조하며 9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을 이룬 신 감독을 흔들고 있다고 진단한다. 러시아와의 경기 전에 “러시아가 이겨라”는 댓글이 줄을 잇고 아들처럼 아예 우리 팀이 참패당하길 원하는 현상을 축구협회는 애써 외면하는 듯하다.

월드컵 본선 진출 확정 후 이렇게 욕을 먹는 대표팀은 거의 전례가 없다. 2014 브라질월드컵에서 1무2패의 참혹한 성적을 거둔 홍명보 전 감독도 신 감독처럼 대타로 지휘봉을 잡았지만 초반 분위기는 우호적이었다. 2012 런던올림픽에서 사상 첫 동메달을 딴 업적으로 국민적 기대감을 받았기 때문이다. 국민 신뢰와 경기력이 바닥인 신태용호는 지금이 얼마나 큰 위기인지를 알아야 한다. 내년 러시아월드컵 본선까지 시간이 얼마 안 남은 대표팀이 국민의 지지를 바란다면 이기는 방법 외에는 없다. 스포츠 세계에서 여론은 승부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승리가 거저 오지는 않는다. 문제점을 파악하고 결과를 속히 도출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종목은 달라도 바닥을 딛고 재기에 성공한 허재 감독의 한국 농구팀은 좋은 예다. ‘농구 대통령’ 허 감독은 2009, 2011년에 이어 지난해부터 세 번째로 대표팀을 이끌고 있다. 대표팀 감독으로서는 선수시절 명성만큼의 성과를 보여주지 못했다. 특히 2009년 중국 톈진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허재호는 역대 최악의 성적(7위)으로 비난을 샀다. 2011년에도 유의미한 성적은 거두지 못했다. 대표팀 감독 삼수생에 대한 믿음은 크지 않았다.

지난 8월 레바논에서 열린 아시아컵 대회가 재평가 계기가 됐다. 부상자가 속출, 역대 최약체라던 허재호는 마치 버전업된 스마트기기처럼 수준을 한 단계 뛰어넘었다. 지금까지 대표팀은 높이의 열세를 만회하려 3점슛을 난사하는 방식에 머물렀다. 하지만 이번 대회에서는 빠른 패스와 활발한 움직임으로 공간을 창출하는 플레이가 돋보였다. 경기 스타일이 올해 미국프로농구(NBA) 우승팀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와 비슷하다는 찬사를 받았다. 한국농구연맹(KBL) 관계자는 “세계랭킹 11위 호주와 뉴질랜드 등 막강전력의 오세아니아 국가들이 처음 참여했음에도 뉴질랜드를 누르고 3위에 오른 것은 우승에 버금간 쾌거”라고 흥분했다.

허 감독의 마법은 무엇이었을까. 특별한 비결은 없었다. 단지 한국팀에 맞는 최적의 전술에 집중했다. 세대교체된 데다 중동·오세아니아 국가 선수들에 비해 체구가 작은 젊은 선수들의 스피드를 활용했다. 2m 신장의 최준용을 가드로 전환해 높이 싸움에 대응한 역발상도 주효했다. 정공법으로는 강호들을 꺾기 어렵다는 생각에서다.

신태용호 역시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개인 기량이 처지는 것을 인정하고 스피드와 체력전이라는 전통적 무기를 갈고닦는 수밖에 없다. 되지도 않는 고급 전술을 고민할 바에야 잃어버린 헝그리 정신을 깨울 마인드컨트롤을 주문하는 것이 낫다. 당장 10일 밤 열리는 모로코와의 평가전이 중요하다. 어떻게든 이겨놓고 팀을 정비해야 한다. 평가전이라고 실험정신 운운할 때가 아니다. 월드컵 최종예선의 격전을 마치고 이틀도 채 못 쉰 모로코에도 패하면 희망을 접는 게 낫다. 신 감독의 운명을 가를 시간은 상당히 빨리 올지 모른다. 신태용은 허재처럼 될 수 있을까.

고세욱 스포츠레저부장 swk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