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크레이그-마틴, 폴 매카시, 엘 아나추이, 줄리안 오피….
미술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이름만 들어도 두근거리는 현대미술 거장들의 개인전이 경쟁하듯 열리고 있다. 전시 장소가 서울 종로구 삼청동 일대에 집중돼 한꺼번에 관람하기에 편리하다. 줄리안 오피 개인전만 경기도 수원시에 마련됐는데, 80점에 달하는 대규모 물량이라 따로 찾아갈 만하다. 마침 1990년대 세계미술계에 부상했던 영국 ‘YBA(Young British Artists)’의 산실인 골드스미스 대학의 교수(크레이그-마틴)와 제자(오피)가 나란히 전시를 가져 뜻 깊다.
가나 설치미술 작가 엘 아나추이 개인전(바라캇 서울 11월 26일까지)
바라캇 서울은 세계적인 컬렉터인 팔레스타인계 미국인 파에즈 바라캇이 영국 런던, 미국 로스앤젤레스,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에 이어 지난해 10월 서울에 낸 지점이다. 이번에 아프리카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거장 아나추이(73) 전시를 열어 진가를 발휘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은빛 금빛이 강렬한 태피스트리(무늬를 넣어 짠 벽걸이용 직물)가 커튼처럼 걸려 있다. 버려진 병뚜껑을 엮어 짠 것임을 알고 놀라게 된다. 작가는 이를 통해 소비와 낭비라는 현대사회의 문제를 고발한다. 또한 반강제적인 무역협정에 따라 토착 경제를 파탄시킨 역사를 가진 서구 술병의 뚜껑으로 직조한 ‘금속 태피스트리’는 식민의 상처와 제국주의 수탈의 기억을 환기시킨다. 조각의 개념을 확장시킨 이런 작품세계로 그는 2015년 베니스비엔날레 평생공로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미국 현대미술 작가 폴 매카시 개인전(국제갤러리 10월 29일까지)
폴 매카시(72)는 자본주의의 폭력성을 유쾌하게, 때로는 과격하게 고발하는 문제적 작가이다. 2012년 국내 첫 개인전에 이어 두 번째.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과 섹스하는 돼지, 피범벅이 된 산타클로스 등 엽기적 오브제를 선보여 충격에 빠트렸던 그가 이번에는 백설공주와 난쟁이 등 동화 같은 소재를 들고 나왔다.
가장 매혹적인 것은 바닥에 눕혀진 곱슬머리 백설공주의 두상. 거대하긴 하지만 비누조각처럼 부드러운 살구색과 흰색 실리콘 조각의 목에 철심이 박혀 있어 섬뜩하다. ‘코어(core)’로 불리는 이것은 실리콘 조각을 하기 전에 주조과정에 사용되는 뼈대다. 옆에는 그 뼈대 안의 또 다른 코어로 보이는 조각이 널브러져 있다. 완성된 작품보다 코어에서 더 진정한 내면을 발견했다는 작가. 그리하여 그 뼈대 이전의 또 다른 뼈대를 상상해 계속 코어를 만든다. 러시아 인형 마트로시카처럼 코어 조각이 계속 생성될수록 구체적 형상이 제거되며 추상의 형태를 갖는다.
코어의 반복 생산은 자본주의 문화의 첨병인 월트 디즈니의 마케팅 전략에서 빈번히 사용되는 ‘스핀 오프’(파생 작품)에 대한 어퍼컷이기도 하다.
영국 개념미술 작가 마이클 크레이그-마틴 개인전(갤러리현대 11월 5일까지)
아이폰 노트북 마우스 전구…. 일상의 물건들이 캔버스 안으로 들어왔는데 낯설다. 굵은 윤곽선으로 단순화시킨 이것은 거인국의 것처럼 엄청나게 큰데다 부분을 클로즈업했기 때문이다. 색상 또한 익히 봐 왔던 게 아니다. 우리가 언제 분홍색 전구, 빨강 파랑의 맥주 캔을 본 적이 있던가. 마이클 크레이그-마틴(76)은 “예술은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는 것이다. 예술은 어느 것도 만들어내지 않는다. 이미 주위에 있는 것을 다룰 뿐이다”며 “사물이 아주 간단하고 투명한,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상태에 이를 때까지 가보려고 한다”고 말한다. 단일 작품 뿐 아니라 제단화나 병풍처럼 연속적인 작품도 내놨다. 작가는 런던 인근 골드스미스 대학에 교수로 재직하며 1980년대 후반 데미안 허스트 같은 세계적 작가를 키워냈던 교육자이기도 하다. 갤러리현대에서는 5년 만의 개인전이다.
영국 팝아트 작가 줄리안 오피 개인전(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내년 1월 21일까지)
크레이그-마틴의 제자인 골드스미스 대학 출신의 줄리안 오피(59)는 익명의 도시인이 바삐 걷는 옆모습을 만화처럼 굵은 선으로 표현한 영상 혹은 회화 작품으로 한국에서도 인기를 누리는 작가다. 이번 전시는 미술관 개관 2주년 기념으로 마련됐는데, 초기작부터 최근작까지 망라하며 물량 면에서 압도적이다.
특유의 걷는 사람뿐 아니라 동물 풍경 등으로 소재를 확장하고, 영상 벽화 태피스트리까지 장르도 폭넓다. 실제 머리를 스캔하고 3D기술로 프린트한 후 직접 채색한 거대한 두상 ‘델핀.1’, 도시 이미지의 기억을 담아낸 8m 높이의 대규모 설치 조각 등 평소 보지 못했던 작품들이 나와 반갑다. 한국인에게는 서울 동작구 사당동 일대를 걷는 서울 사람들을 묘사한 작품이 가장 시선을 사로잡을 것 같다.
왜 걷는 사람이냐는 질문에 작가는 “걷는 사람을 주로 보지 않느냐. 아주 흥미로운 소재다. 얼굴은 내게 중요하지 않다. 얼굴을 몰라도 어떤 유형의 사람인가는 걷는 모습을 통해서도 충분히 알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현대미술 거장들의 향연
입력 2017-10-09 0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