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철륜 <8> “나도 교회 다녀, 너 잘난 체하지 마” 상사의 폭언

입력 2017-10-09 00:02 수정 2017-10-09 09:27
독일 유학 시절이었던 1985년, 남편을 보기 위해 한국에서 온 아내와 함께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성을 방문한 필자.

“그놈, 옥에 티가 너무 크더라.”

우리 집 식구들이 한바탕 난리를 피우고 돌아간 뒤, 장인 되실 분이 가족회의에서 내뱉은 말이었다. 나중에 그 얘기를 전해 들은 나는 쾌재를 불렀다. 왜냐하면 나를 ‘옥’으로 봐주셨기 때문이다. 그 후에도 몇 번의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우리는 만난 지 1년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장모님은 “석 달도 못 채우고 친정으로 돌아올 것”이라며 혼수도 별로 해주시지 않았다. 신혼여행지는 춘천. 돈을 아끼기 위해 장인의 차를 빌려 다녀왔다. 어느덧 올해로 결혼 40주년을 맞았지만, 아내는 여전히 친정으로 돌아가지 않고 있다.

대한신학교(안양대 전신)에서 교회음악과를 맡아 근무하던 중 마음이 힘들 때가 있었다. 당시 학교 내 높은 직책에 있었던 K 때문이었다. 성격도 괄괄하고 다혈질인 그는 술 담배에 자유로웠다. 그는 “신학교 외에 일반학부 학생들도 배려해야 한다”고 했다. 결국 신학교에 재떨이까지 등장했다. 어느 날, 그가 나를 부르더니 교회음악과 강사 한 사람을 추천했다. 이력서를 살펴보니, 교회음악을 가르치기에는 부적절한 사람이었다. 그에게 조심스럽게 의견을 전달했다. “다른 사람을 추천해주시면 어떨까요.”

곧바로 폭언이 날아왔다. “까라면 까는 거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나도 교회 다니는 사람이야, 당신만 잘난 체하지 마.”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자 그는 교수들이 모두 모여 있는 식당에서 피우던 담배를 발로 비벼 끄면서 한마디 던졌다.

“야 김철륜! 내가 너를 이 담배꽁초 비벼 밟듯이 뭉개 주겠어.”

황당했다. 하지만 학교에서 내 목숨이 그에게 달려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를 피할 수 있는 길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마음속에 ‘유학을 떠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는 걱정 말고 다녀오라고 격려해줬다. 당시 아이가 둘이었다. 첫째는 초등학교에 입학한 상태였다. 마침 독일 레겐스부르크 대학에서 오르간을 전공한 선배에게 유학에 대한 정보를 얻고, 그 대학으로부터 초청장도 받았다.

1984년 9월, 독일행 비행기를 탔다. 알래스카를 경유해 22시간이나 걸려 현지에 도착했을 때는 앞이 깜깜했다. 대학에서 기숙사를 배정받았는데, 4층이었다. 엘리베이터 없이 며칠 오르내리다 그만 무릎 관절에 탈이 났다. 학교 학생처 직원에게 사정을 얘기했더니 깜짝 놀라면서 “내 잘못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리고 왜 사전에 장애인이라고 말하지 않았느냐면서 장애인 전용 기숙사로 옮겨줬다.

그곳에서 나의 독일어 어학 교사 볼프강을 만났다. 법률학을 전공한 볼프강은 전신이 불편한 장애인이었지만, 나에겐 최고의 어학 강사였다. 1년 만에 독일어 과정 최고급까지 마쳤다. 중급까지만 하면 입학이 가능했지만 공부가 재미있어서 계속했다. 독일어로 시까지 써서 2권이나 냈다. 돈이 필요할 때면 번화한 거리로 나가 큰 소리로 읽으면서 권당 9마르크(약 3000원)에 시집을 팔기도 했다.

대학원 생활은 매일 오전 9시 도서관에 나가 밤 9시 기숙사로 돌아오는 강행군이었다. 그러던 중 파사우대학교에 있는 음악교육과 교수 허락으로 그곳에서 박사 논문 쓸 기회를 얻었다. 잘 풀리는 것 같았다.

정리=박재찬 기자 jeep@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