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빛내렴의 성화묵상] 아담, 이브와 ‘따로 또 같이’ 걷다

입력 2017-09-30 00:05
베르나르 팔리시(1510∼1589년쯤), 진흙에 유약, 25㎝ 길이의 접시, 프랑스 아드리앙 뒤부쉐 박물관 소장
최근 여성혐오, 남성혐오 같은 말들이 거론되고 있다. 성희롱과 혐오발언 되받아치기, 무시와 협박, 나아가 노골적인 증오 범죄도 들려온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면 결국 차별과 배제, 추방과 죽임의 유혹에 빠진다. 세상의 절반인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적대시하면 공동체는 자멸의 길에 이르게 된다. 아무리 아름다운 이들이라 할지라도 상호 존중하지 않으면 그 관계는 산산조각 날 것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그릇이라도 조심히 다루지 않으면 깨지는 이치다.

이번엔 접시를 들고 왔다. 16세기 프랑스의 다재다능한 도예가이자 자연과학자이기도 한 베르나르 팔리시의 작품이다. 칼뱅의 가르침을 따르는 위그노였던 그는 구교로 개종하길 거부하다 바스티유에서 옥사했다. 하지만 팔리시는 재능과 실력으로 구교도들에게도 존경을 받았다. 탄압과 박해로 순교했던 그가 자신의 아름다운 작품으로 세상 사람들을 다시 하나로 연결했다는 점은 역설이다.

타원형 접시 속 부조 형상은 단순 명료하다. 혼자 있는 남자에게 하나님이 ‘알맞은 짝’을 만들어 주시는 모습을 담고 있다(창 2:20∼25). 접시의 오른쪽엔 의인화된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고 그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든 후 맞이하며 안으시는 모습이고, 왼쪽 아래에는 잠들었다 이제 곧 깨어나려는 듯 손을 들어 올리는 아담의 모습이다. 접시의 화려한 테두리는 두 사람이 이상적인 꽃밭에 둘러싸여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는 낙원에 대입할 수도 있겠다. 이제 두 사람은 각기 남자와 여자로서 서로를 채우는 하나의 존재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알맞은 짝’이라고 하니 마치 여성이 남성의 단순 조력자인 듯 오해할 수도 있겠는데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창 1:27)는 말은 이미 남성과 여성이 각각의 존재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고 있다. 허나 둘이 협력자로서 힘을 합칠 때에야 더욱 완전체로서 역할을 다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곱씹을수록 놀랍다, 머리도 발치도 아닌 심장에 가장 가까운 옆구리 부위로 여자를 만드셨다니! 이는 군림도 예속도 아닌 동등하게 나란히 옆에서 사랑하며 서로 조력자로서 팀워크를 이루라는 뜻이다.

아담이 여자를 향해 “뼈도 나의 뼈, 살도 나의 살”이라 한 것도 여자가 남자의 소유가 아니라, 남자와 여자가 서로 도우며 동행할 때에만 온전한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음을 의미한다. 물론 양성은 고유한 차이와 역할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점을 언급하면서도 “주님 안에서는, 남자 없이 여자가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가 있지 않음”을 강조하고 있다(고전 11:11).

기본적으로 남녀 성에 대해 우리가 편견을 깨고 다가갈 때에만 또 다른 인간집단의 파편화와 이질화, 갈등이 점차 사라질 것이다. 남녀를 넘어 지역, 세대, 인종, 계층 간 벽 쌓기가 중단될 것이다. 그때 우리는 건강한 상호협력의 관계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바울처럼 외칠 수 있을 것이다.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이다(갈 3:28).” 우린 ‘따로’ 걸으며 다른 방식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또 같이’ 도우며 일체감을 맛볼 수 있다. 참으로 다양과 통일은 얼마나 조화로운가.

금빛내렴<미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