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지호일] 검찰과 권력, 아슬한 동행

입력 2017-09-28 18:27 수정 2017-09-28 21:23

“수사로 세상이나 제도를 바꾸려 하면 검찰 파쇼가 된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생전 ‘미스터 특수’라 불렸던 일본의 요시나가 유스케(吉永祐介) 전 검사총장(검찰총장)이 1993년 총장 취임 기자회견에서 한 말이다. 그 전년 도쿄지검 특수부는 여당인 자민당의 거물 정치인 비리를 수사해 약식기소만으로 종결하면서 거센 비난에 휩싸였다. 여론은 검찰이 권력의 눈치를 봤다고, 여당은 검찰이 입증되지 않은 범죄 의혹을 공개했다고 공격했다. 일본 검찰의 전례 없는 위기 속에 한직으로 밀려났던 요시나가 검사가 구원등판하게 됐다. 그는 검찰 수사가 특정한 목적성을 띠거나, 정치적 의도를 담아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수사가 정국이나 여론 동향을 살필 때의 변질 가능성에 대한 경계도 있었다.

지금의 한국 검찰을 보자. 아군 하나 없는 그야말로 사면초가의 위기다. 그런데 더 없이 분주하기도 하다. 하수처리장처럼 지난 정권의 찌꺼기가 꾸역꾸역 몰려와 쌓이고, 검찰은 끝없는 압수수색과 출국금지, 체포로 화답한다. 박근혜정부 국정농단 사건 잔불 정리가 한창인데, 청와대 캐비닛에서 나온 문건들이 박스 채 배달됐다. 이명박정부 국가정보원의 여론 공작,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등 묵직한 사건들도 맡겨져 있다. 국정원이 10여개 적폐 항목을 추가로 조사 중이니 검찰행 대기표를 받아둔 사건도 많다. 문재인 대통령이 “방산비리는 이적행위”라며 독려한 한국항공우주산업(KAI) 수사 역시 현재 진행형이다. 서울중앙지검 특수·공안 수사 인력이 온통 매달려 있지만 과부하 상태는 한동안 계속될 것이다.

윤석열 중앙지검장은 지난해 12월 국정농단 특검에 합류하게 됐을 때 “검사가 수사권 갖고 보복하면 그게 깡패지, 검사인가? 정권에 대한 수사를 반복하는 게 개인적으로는 좋지 않다”고 했지만, 지금 과거 두 정부 수사를 진두지휘하고 있다. 4년 전 댓글 사건 수사 때부터 숙명처럼 정해진 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찌됐건 현 정부가 적폐세력으로 지목한 검찰이 적폐 청산 선봉에 선 형국이다. 이이제이(以夷制夷)라고 봐야 하나.

검찰은 질주하지만 대부분 자의에 의한, 자체적으로 생산한 수사는 아니다. 청와대가 메가폰을 잡고 여당, 국정원, 감사원 등 국가적 차원에서 사건을 발굴해 검찰로 넘기는 모양새가 반복된다. 적폐 척결, 사회 정의란 거창한 명분과 함께.

‘촛불혁명으로부터의 탄생’을 표방하는 지금의 정부는 과거 정부의 폐단 단죄와 차별화를 통해 정통성을 확고히 하려는 거 같다. 문 대통령이 최근 5대 사정기관장을 모두 불러 “부정부패 척결을 새 정부 모든 정책의 출발로 삼겠다”고 공언한데서도 읽힌다. 오물 쌓인 도랑을 청소하는 일은 결국 검찰의 몫이다.

그러나 ‘수사로 세상을 바꾸려는’ 건 상당한 위험성을 내포한다. 진행 중인 수사들에서 적폐 청산이란 명분을 걷어내면, 그리고 시점을 달리해 보면 그 속성은 정치적 수사, 표적 수사일 수 있다. 몰아치는 청산 작업 뒤로는 과거 일들에 대한 권력의 한풀이 성격도 비친다.

물론 적폐 청산은 시대와 국민이 요구하는 사명이다. 과거부터 쌓여온 폐단을 뿌리 뽑을 적기인 것도 맞다. 다만 권력이 주고, 검찰이 받는 수사 작동 방식이 못내 꺼림칙하다. 현재의 비상시기가 지나고도 정권과 검찰의 동행이 당연시될까 불안하다. 검찰 수사의 유용성과 효율성을 맛본 위정자들은 국정 동력이 필요할 때면 사정의 칼을 호출하려 할 터.

검찰 중독 증세를 의심받던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폐해를 우리는 보지 않았나. 문재인정부는 정의로우니 ‘지금은 맞고, 그 때는 틀리다’고 단언할 수 있겠나. 또 개혁 태풍의 눈에 선 검찰로서는 권력과 민심의 호응을 얻는 수사로 반전을 모색하지 않겠나. 검찰 개혁은 비대한 검찰 권한의 축소뿐 아니라 권력으로부터의 독립도 뜻한다. 검찰을 앞세운 정치는 비극의 씨앗이 될 수 있다.

지호일 사회부 차장 blue5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