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발명 130년만에… 사우디 여성, 운전대 잡다

입력 2017-09-27 19:28 수정 2017-09-27 22:00
여성 운전금지 철폐를 촉구한 ‘운전 시위’에 동참한 사우디아라비아 여성이 2014년 3월 29일 사우디 수도 리야드에서 자동차를 운전하고 있다. 당시 수많은 사우디 여성들이 당국의 체포 위험을 무릅쓰고 운전을 감행했다. 이런 노력 덕분에 사우디 여성은 내년부터 합법적으로 운전을 할 수 있게 됐다. AP뉴시스

여성의 대외활동을 가혹할 정도로 억압해 온 사우디아라비아가 그동안 여성에게 금지했던 운전을 마침내 허용키로 했다. 사우디 현지 언론과 CNN방송 등은 26일(현지시간)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사우디 국왕이 칙령을 통해 여성이 운전할 수 있도록 결정했다고 보도했다.

칙령에는 여성에게 남성과 동등하게 운전면허증을 발급하는 개정 교통법규의 시행과 이를 담당할 장관급 위원회 구성 등의 내용이 담겼다. 사우디 당국은 30일 안에 칙령 실행을 위한 권고사항을 마련해 내년 6월부터 운전면허증을 발급할 방침이다.

사우디는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여성 운전을 금지한 나라로 이번 조치는 여성 억압의 상징적인 악습에 마침표를 찍은 것으로 평가된다. 여성 운전을 금지하는 명시적 법률 조항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정부는 그동안 여성에게 운전면허증을 발급하지 않는 방법으로 운전을 통제해 왔다. 외국인 여성도 예외가 없었다.

그동안 사우디에서 운전을 ‘감행’한 여성은 체포돼 벌금형이나 구류 처분을 받았다. 여성 운전 금지 철폐를 촉구해 온 사우디 여성인권 운동가 루자인 알하스룰은 올 들어 73일 동안 구금됐다. 최근엔 한 여성이 남성 의상을 입고 운전하는 영상이 유포돼 추적 끝에 체포됐다. 2014년에는 여성 운전 금지에 항의하는 운동의 일환으로 사우디 여성들이 단체로 차를 몰며 거리에 집결하기도 했다.

이번 조치는 단순히 운전 허용에만 그치지 않고 향후 사회와 경제틀까지도 바꾸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운전이 금지된 사우디 여성은 그동안 사회활동 제약과 경제적 부담이란 이중고에 시달려 왔다. 이동의 제약으로 학업이나 직장생활에도 지장이 많았고 남성 운전기사를 고용하기 위해 적잖은 비용을 지출해야만 했다. 주로 동남아와 서남아 지역 출신으로 사우디 여성의 차를 운전하는 남성 운전사는 현재 80만명에 달한다.

CNN은 이런 변화가 왕위를 계승할 모하메드 빈 살만 왕세자 등장 이후 시행된 개혁의 일환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이번 조치가 사우디 경제구조와 여성 인력 활용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번 발표 직후 국내외에선 환영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여성의 운전 권리 확보를 위해 25년 넘게 투쟁해 온 현지 여성 운동가들은 감격의 눈물을 쏟았다. 사하르 나시프는 BBC방송에 “꿈꾸던 드림카를 장만하겠다”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사우디를 여성 인권 후진국으로 지탄해 온 국제사회도 일제히 이번 조치를 반겼다. 안토니우 구테레쉬 유엔 사무총장은 “사우디의 결정을 환영한다”고 밝혔고, 미 국무부도 “올바른 방향으로 가는 중요한 조치”라는 반응을 내놨다.

하지만 이번 조치로 사우디 여성이 온전히 해방된 건 아니다. 여성 참정권이 2015년에야 비로소 인정된 사우디는 와하비즘(엄격한 이슬람 근본주의)의 영향으로 여성이 얼굴과 온몸을 가리지 않고는 외출할 수 없다거나 4명까지 일부다처제가 허용되고 여성의 의사에 반한 조혼(早婚)이 성행하는 등 여성을 옥죄는 악습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다.

한편 블룸버그 통신은 여성의 운전 허용으로 사우디 자동차 시장에서 점유율이 높은 일본 도요타와 한국 현대차가 이득을 볼 것이라고 전망했다. 도요타는 지난해 사우디에서 67만6000대의 차를 팔아 시장점유율 32%를 차지했다. 현대차 점유율은 24%다.

구성찬 기자 ichthu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