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 패션디자이너와 표절소송 합의 이끈 이명호 작가 “미술계 표절에 대한 정확한 판례 만들고 싶었어요”

입력 2017-09-27 18:50 수정 2017-09-27 21:32

“그동안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았을 뿐이지요. 저도 (표절 당한 일이) 여러 번 있었어요. 이번엔 (싸움을 걸 만한) 좋은 상대를 만난 데다, 더 이상 참으면 대놓고 표절해도 넘어가는 작가라 생각할 거 같아 한번 해 본 거지요. 미술계 전체에 표절에 대한 정확한 판례를 만들자는 생각도 있었고요.”

영국의 유명 패션 디자이너 마리 카트란주를 상대로 표절 소송을 제기해 합의를 이끌어낸 이명호(42·사진) 사진작가의 표정이 환했다.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 종로구 사비나미술관에서 최근 그를 만났다. 전시장엔 카트란주가 무단 도용해 T셔츠 등에 사용했던 문제의 작품 ‘나무 #3’도 나왔다.

팝과 드라마 등 대중문화는 한류를 탔다. 하지만 순수 예술인 미술에서 한국은 서구를 베끼는 입장이었다. 동남아 작가가 한국 작가를 표절해 논란이 된 사례는 더러 있었다. 이번엔 선진국, 그것도 디자인을 국가산업으로 미는 영국에서 한국 작가의 작품을 표절한 사례가 일어난 것이다.

그래서 이 작가는 2015년 10월 미국 샌프란시스코 연방지방법원으로 달려갔다. “한국은 판례가 부족하고 영국은 불리할 거 같아서”였다. 결국 합의로 종결한 데 대해선 “국내 언론에 널리 소개됐고, 무엇보다 고교 사회교과서(비상교육 출판사)에 자세히 다뤄져 이 정도면 의미가 있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중앙대 사진학과 출신의 이 작가는 나무 숭례문 등 피사체 뒤에 거대한 캔버스를 설치하고 사진을 찍는다. 그래서 캔버스에 그린 듯한 효과를 내는 기법으로 유명해졌다. 미국 장 폴 게티 미술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사진미술관, 일본 기요사토 사진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등 유수의 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돼 있다.

왜 피사체 뒤에 캔버스를 설치할까. “예술이 무얼까에 대한 본질적 질문을 환기하는 작업이지요. 사진이면서도 회화가 가졌던 본연의 기능, 그러니까 재현의 기능을 환기하는 것이죠.”

나무 연작이 유명해 ‘나무 작가’로 불리는 그는 내년에는 바위 시리즈에 도전한다. 수천 년 동안 한 자리에 있었던 거대한 바위를 기중기로 들어 올린 뒤, 캔버스를 바닥에 놓고 찍는다. 그 결과 캔버스에 바위를 그린 듯한 효과를 낸다. 나무 연작이 정면에서 찍는 거라면 바위 연작은 부감하듯 찍는다는 게 차이다.

그에게도 아픈 경험이 있다. 숭례문 복원을 기념해 문화재청의 허가를 얻었지만, 5t짜리 거대한 캔버스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비계가 무너졌던 것이다. 그 한을 풀 듯 프랑스 파리 개선문을 찍는 작업에 도전하고 있다. 바닥에 캔버스를 설치해 찍은 신작과 설치 작품 등을 선보인 이번 개인전은 29일 종료된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