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퇴직 소방관 공무상 재해 인정… 1만3000여차례 화재 진압, ‘소뇌위축증’ 투병

입력 2017-09-25 05:00
이실근씨가 소방공무원으로 근무할 때인 2006년 대구 달성군 서재초등학교를 방문해 학생들에게 일일 소방교육을 하고 있다. 이실근씨 제공

“이번 판결을 보고 저와 같은 처지의 후배들이 용기를 냈으면 좋겠습니다.”

퇴직 후 발병한 희귀 뇌질환을 공무상 재해로 인정해달라며 4년여의 법적 다툼을 이어오다 대법원에서 공상으로 인정받은 전직 소방관 이실근(62)씨는 24일 국민일보와 통화에서 이같이 말했다. 그는 “병원비로 가진 돈을 전부 써버렸는데 몸이 불편해 돈을 벌 수도 없었다”며 “좋은 결과가 나와 보람을 느낀다”고 감격해 했다.

대법원 2부(주심 권순일 대법관)는 이씨가 공무원연금공단을 상대로 낸 요양급여 청구 소송에서 최근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고 24일 밝혔다.

이씨는 1977년 소방관으로 임용돼 2003년 대구 지하철 참사 등을 비롯해 대구에서 일어난 화재 현장에 1만3000여 차례 출동했다. 그러다 2013년 소뇌위축증 진단을 받고 건강이 악화돼 이듬해 9월 명예퇴직 했다. 소뇌위축증 환자는 소뇌 기능에 이상이 생겨 보행이 어려워지거나 말이 어눌해지는 등 운동·언어장애를 겪는다.

2014년 이씨는 의료진 소견서를 첨부해 공단에 치료비 명목으로 요양급여를 신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소뇌위축증 발병은 유전적 요인으로 인한 것이며 소방 업무와 인과관계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씨는 소송을 제기했다.

이후 지난한 법정 투쟁이 이어졌다. 1심과 2심 재판부 모두 소뇌위축증이 유전성 질환일 가능성이 있다며 공상을 인정하지 않았다. 소방관의 업무와 질병 간의 인과관계를 설명할 의학적 근거가 부족하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를 뒤집고 이씨의 손을 들어줬다.

대법원은 김지은 이화여대 뇌인지과학과 교수의 증언 등을 토대로 원심 판결을 파기했다. 김 교수는 “소뇌위축증이 비록 유전성 질환일 가능성이 있다 해도 화재현장에서 독성물질과 열에 노출되고 산소 부족, 심리적 스트레스가 축적될 경우 발병이 촉진되거나 악화할 수 있다”고 증언했다. 파기 환송심 재판부가 공상 인정을 확정하면 이씨는 약값, 병원비 등을 비롯해 장애 연금도 받을 수 있다.

이씨는 “질병이 생겼을 때 인과관계 증명을 본인이 해야 하기 때문에 공상 인정을 받기가 어렵다”며 “비슷한 처지의 후배들 중에 중도 포기하는 사람들도 많고 재판 도중 사망하는 경우도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불길 속을 뛰어드는 소방관의 질병에 대해 정부가 적절한 혜택을 줘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가현 기자, 대구=최일영 기자 hy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