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수차 사라지고 트랙터 행진… 달라진 집회 풍경

입력 2017-09-24 18:19
‘고 백남기 농민 1주기 추모대회’를 맞아 서울로 상경한 농민단체 회원들이 23일 서울 종로구 르메이르 빌딩 앞에서 집회를 갖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오른쪽은 이날 집회에 등장한 농업용 트랙터. 경찰은 이날 차벽과 살수차를 동원하지 않았고 트랙터 행진도 막지 않았다. 뉴시스, 신재희 기자

23일 열린 ‘고(故) 백남기 농민 1주기 추모대회’ 현장의 모습은 이전과 사뭇 달랐다. 경찰의 살수차와 차벽은 보이지 않았다. 농민단체는 행진 때 농업용 트랙터를 동원했지만 경찰은 별다른 제지를 하지 않았다. 경찰은 질서유지에 필요한 최소한의 경찰력만 운용했다. 집회 참가자와 경찰이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했던 과거와 달리 집회는 평화롭게 진행됐다.

백남기투쟁본부는 시위에 참가했다가 경찰 물대포를 맞고 쓰러져 300여일 사경을 헤매다 숨진 백 농민을 추모하는 집회를 이날 오후 7시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었다. 주최 측 추산 2000여명이 참여했다. 전체적으로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고인을 기억하고 사건을 돌아봤다.

백 농민의 장녀 도라지씨는 무대에 올라 “긴 시간 동안 함께해준 시민께 감사 인사를 드린다”며 운을 뗀 뒤 “강신명 전 경찰청장 등을 고발한 지 2년이 돼가지만 아직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며 빠른 수사를 촉구했다.

김영호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은 “백 농민이 외친 쌀값 보장, 밥쌀 수입 반대는 단순한 생존권적 요구를 넘어 한국 농업의 절규였다”면서 “문재인정부는 농업을 살리기 위한 책임 있는 개혁 조치를 실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추모 대회가 진행되는 동안 경찰은 주변에 차벽을 설치하지 않았다. 백 농민 사망의 원인이었던 살수차도 배치되지 않았다. 경찰개혁위원회가 권고한 ‘집회·시위 자유 보장 방안’에 따른 것이다. 경찰 병력 배치도 최소화했다. 방패와 진압봉으로 무장한 의경들도 모습을 감췄고 일부 의경만 자리를 지켰다.

공식 추모대회에 앞서 전국농민회총연맹은 오후 2시 서울 중구 농협중앙회에서 하나로마트 등 농협판매장 수입 농산물 판매를 규탄하는 사전 집회를 가졌다. 집회 이후 참가자들은 농업용 트랙터를 몰고 행진하기도 했지만, 교통체증과 위험성 등의 이유로 이를 막았던 이전과 달리 경찰은 트랙터 행진을 허용했다. 경찰은 최근 농민단체 트랙터 행진 차단은 집회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를 수용한다고 밝힌 바 있다.

오후 4시엔 백 농민이 물대포를 맞았던 종로구 르메이에르 빌딩 앞에서 전국농민대회가 열렸다. 이들은 한손에 막 추수한 벼 이삭을 쥐고 ‘쌀값 보전’과 ‘농민 헌법 개정’을 주장했다. 김옥임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부회장은 결의문을 낭독하며 “국민과 손을 잡고 농민 권리와 식량 주권을 위한 투쟁에 나서야 한다”며 “농민의 권리를 보장하고 국가의 농업관을 담은 농민 헌법 개정을 이뤄내야 한다”고 말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 석방을 촉구하는 집회도 도심 곳곳에서 진행됐다. 박 전 대통령 무죄서명 운동본부는 오후 2시 서울 종로구 마로니에 공원 앞에서 “죄 없는 박 대통령을 즉각 석방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경찰력 배치가 최소화돼 이들 친박·보수단체와 백 농민 추모집회 참여자들 간 충돌 우려도 제기됐으나 모두 평화롭게 마무리됐다.

신재희 기자 j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