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몸짓, 역사와 예술이 되다

입력 2017-09-24 19:10 수정 2017-09-24 21:32
미국 부부 작가 알로라 & 칼자디야의 ‘하프 마스트, 풀 마스트’는 체조선수가 깃발처럼 만기와 조기를 연기하는 퍼포먼스를 담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중국 작가 아이웨이웨이가 도공처럼 분장하고 도자기 떨어뜨리는 사진을 기록한 작품 ‘한나라 도자기 떨어뜨리기’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일본의 60년대 전위 그룹 ‘제로 지겐’ 소속 가토 요시히로가 지난 21일 기자간담회에서 작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아르헨티나 출신 미카 로텐버그는 파스타 생산을 소재로 여성의 반복적인 노동이 갖는 함의를 코믹하게 다룬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원형전시장을 잘 활용한 전시장 모습.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10년마다 열리는 독일 뮌스터조각프로젝트에서 돋보인 경향은 ‘퍼포먼스’였다. 공동 큐레이터를 맡았던 독일 출신 브리타 페터스는 과거와 달리 올해 작가들은 퍼포먼스에 대한 관심이 매우 커졌다고 총평했다. 회화 조각이 대세이던 1960년대 전위적이라고 평가받던 퍼포먼스는 이제 동시대 작가들이 사랑하는 ‘미술 언어’가 됐다.

한국에서는 67년 작가 10여명이 펼쳤던 ‘비닐 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이 최초의 퍼포먼스로 기록된다. 당시 언론이 ‘괴상한 미술’이라고 불렀던 이 퍼포먼스가 출범한 지 50주년을 맞아 국립현대미술관이 제대로 ‘성찬’을 차렸다. 퍼포먼스를 주제로 해 열린 첫 국제기획전이다.

‘퍼포먼스의 대모’ 유고슬라비아 출신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발칸 연애 서사시’는 그 과격함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중국 현대 미술의 거장 아이웨이웨이가 “전통을 깨라”는 마오쩌둥의 지시를 풍자한 ‘한나라 도자기 떨어뜨리기’는 ‘역대급’ 퍼포먼스 작품이다. 올해 뮌스터 조각프로젝트에 초청됐던 아르헨티나 출신 미카 로텐버그 등 한창 주가를 올리는 작가도 대거 나왔다.

‘역사를 몸으로 쓰다’라는 전시 제목이 말하듯 미술사적인 접근을 한다.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이 머리를 풀어헤쳐 붓글씨를 쓴 그 유명한 ‘머리를 위한 선’으로 서막을 여는 건 그런 이유다. 이어 한국과 일본에서 60년대 해프닝으로 불렸던 퍼포먼스의 역사를 기록과 영상으로 보여준다.

집단기억과 문화를 퍼포먼스로 보여주는 ‘지금 여기’의 신작들이 관객에게 큰 기쁨을 준다. 과거엔 퍼포먼스가 사진으로 기록됐지만, 지금은 영상으로 남겨져 더욱 스펙터클하다. 미술계에서 입지를 굳힌 박찬경 임민욱 등 한국의 중견 작가가 초청돼 신작을 내놨다. 특히 영화감독 박찬욱의 동생인 박찬경은 북한 핵 미사일 위기로 남북긴장이 첨예한 이 시점에 북한 소년병을 소재로 시적인 퍼포먼스 영상 작품을 내놔 눈길을 끈다. 북한 군인으로 분한 소년의 유약하고 천진한 모습을 통해 북한군이 갖는 ‘강인한 남성성’의 이미지를 전복시키고 전쟁과 정치, 이념과 무관한 북한을 상상하도록 유도한다.

일상의 몸짓, 공동체 문제는 전시의 또 다른 주제다. 평범한 몸짓을 통해 사회적 발언을 하고 공동체 과제를 언급하는 코너에서는 미국령 푸에르토리코에서 활동하는 부부작가 알로라 & 칼자디야가 비에케스 섬에 대해 다룬 단편영화 ‘하프 마스트, 풀 마스트’가 흥미롭다. 체조선수 23명이 자신의 몸을 깃발처럼 느껴지도록 연기한다. 미국이 2차 세계대전 후 비에케스 섬의 75%를 사격장으로 바꾸면서 일어난 환경파괴를 고발하고 국가 정체성을 찾으려는 저항의 몸짓이다.

아르헨티나 출신 로텐버그는 여성의 노동 문제를 특유의 해학적 어법으로 다룬다. 파스타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거듭 재채기를 하다 피노키오처럼 점점 코가 길어지는 여성을 통해 반복적인 신체 노동을 착취하는 서구 자본주의를 비꼰다.

전시엔 60년대부터 최근까지 미술사적으로 주요한 주요 퍼포먼스 작품 38명(팀) 70여점이 소개된다. 재료 자체가 좋고 풍성하다. 여기에 원형전시장이라는 악조건을 역으로 활용한 디스플레이 덕분에 관람이 즐겁다. 서울관이 아닌 과천관에서 열려 번거로울 수 있지만 놓치기 아까운 전시다. 내년 1월 21일까지.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