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노용택] 공짜 점심은 없다

입력 2017-09-21 17:59

최근 사석에서 만난 여당 중진 의원은 9월 정기국회를 앞두고 다소 비관적인 전망을 내놨다. 그는 “두고 봐라. 이번 정기국회에서 예산 이외에 인사든 개혁법안이든 청와대와 더불어민주당이 원하는 대로 되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했다. 존재감을 부각시키려는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의 협조를 끌어내기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130석에 가까운 보수야당을 상대해야 하는 여당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는 해석을 붙였다. 이 불길한 예언은 정기국회 개원 이후 어느 정도 현실화되는 분위기다.

9월 들어 인사 관련 문제에 연이어 제동이 걸렸다. 헌정사상 최초라는 김이수 헌법재판소장 후보자 인준 부결 사태에 이어 역사관·과학관 논란이 불거진 박성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후보자가 야당의 맹공을 견디다 못해 자진사퇴했다. 청와대는 이미지와 신뢰성에 상당한 상처를 입고 대국민 사과를 해야 했다. 121석 여당도 여소야대 국회에서 한계를 그대로 드러냈다. 여당 일각에서는 “왜 과거 선배 정치인들이 야합이라는 욕을 먹으면서도 정계개편을 밀어붙였는지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는 한탄마저 들려왔다.

과거 대법원장 인준 부결 사태가 정계개편 시발점이 된 적이 있다. 1988년 집권여당인 민정당은 총선에서 125석을 확보해 과반 달성에 실패했다. 나머지 의석을 나눠 가진 야3당은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임명한 정기승 대법원장 임명안을 부결시켰다. 집권 첫해부터 국회에서 발목이 잡힌 노 전 대통령과 민정당은 ‘3당 합당’ 카드를 꺼내들었다. 여당은 합당을 통해 200석이 넘는 의석을 확보했고, 이후 비교적 순조로운 국정운영을 펼쳤다.

정계개편은 문재인정부 출범 직후부터 여야 모두에 주요 화두다.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으로 갈라진 보수 내부에서 통합론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여당 내에서도 국민의당을 끌어안고 안정적인 국정운영을 추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하지만 청와대와 여당은 아직까지 인위적 정개개편을 크게 고려하지 않는 분위기다. 오히려 야당을 설득하고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협치’에 무게를 싣고 있다. 김이수 후보자 인준 부결 이후 여론을 믿고 밀어붙이던 청와대와 여당의 기류 변화도 감지된다. 문 대통령은 지난 18일 미국 뉴욕으로 출국하기 전 국민의당 안 대표와 김동철 원내대표에게 김명수 대법원장 후보자 임명동의안 처리에 협조를 구했다고 한다. 인준 부결 책임을 야당에 돌리며 거칠게 몰아붙이던 여당 지도부도 수습에 나섰다. 추미애 대표가 “제 발언으로 마음 상한 분이 계시다면 심심한 유감을 표한다”고 했다. 청와대와 여당의 읍소작전이 통했는지 김명수 후보자 인준안은 21일 국민의당의 협조를 얻어 가까스로 국회를 통과했다. 청와대와 여당의 이런 모습은 이해가 되면서도 아쉬움이 남는다. 이처럼 모양 빠지는 사과와 사태 수습에 나설 거면서 왜 김이수 후보자 인준 부결 직후엔 야당과 함께할 일이 없을 듯이 험하게 퍼부어댔을까.

협치 대상도 협소하다. 청와대·여당의 러브콜은 국민의당만 향하고 있다. 교섭단체를 구성한 야3당 중 보수야당은 협조를 얻지 못할 거라고 미리 정해놓고 무시하고 있다. 현 정부 정책마다 어깃장을 놓는 보수야당과 협치하는 일이 물론 쉽지 않다. 그렇다고 아예 보수야당을 무시한 채 국정운영을 하는 것도 오만이고 독선이다. 문 대통령은 홍준표 한국당 대표나 주호영 바른정당 대표 권한대행에게도 김명수 후보자 인준 협조를 요청했을까?

김명수 후보자 인준 성공을 통해 절름발이 협치가 성과를 냈지만,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민주당의 고민은 깊어질 것이다. 국회에는 세법개정안,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신설, 방송법 개정 등 여당이 야당의 손을 빌려야만 처리 가능한 사안이 산적해 있다. 국민의당의 몸값은 계속 올라가고 민주당 빚은 늘어갈 수밖에 없다. 빚은 언젠가 이자까지 쳐서 갚아야 한다. 공짜 점심은 없다.

노용택 정치부 차장 nyt@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