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에서 보수와 진보를 나누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현실에 대한 예언자적 비판과 참여를 진보로, 기존 체제에 대한 적극적 순응 혹은 현상유지를 보수로 판단하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진보가 인간화를 주장하는데 반해, 보수는 복음화를, 진보가 사회구원을 말하는데 반해, 보수는 영혼구원을 말하는데서 두 집단을 구별한 것이지요. 그러나 이런 구분과 구별은 이미 목숨을 다했습니다. 보수교회라고 사회 참여를 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예언자적 비판이나 사회봉사가 진보집단의 전유물도 아닙니다. 그런데 정치적이라는 점에서는 두 집단 사이에 큰 차이가 없습니다. 친정부건, 반정부건, 태극기건 촛불이건, 정치권력이건 경제권력이건, 힘 있는 쪽에 붙어 사적 이익을 챙기는 것에서는 차이가 없는 것이지요. 정치적이라는 것이 자신의 분명한 입장을 정직하게 천명하고,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집단들과 서로 존중하면서 타협의 기술을 발휘하는 것이지, 애매모호한 태도, 차지도 뜨겁지도 않으면서, 곤란하면 ‘기도해 봅시다’라고 책임을 회피하는 기회주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점에서는 진보건 보수건 차이가 없습니다. 논쟁 후에 남는 것은 결국 입장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성의 문제라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대한 태도가 보수와 진보를 구별하는 준거였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성경에 대한 문자주의적 해석을 하느냐, 역사비평을 수용하느냐가 기준이었지요. 16세기 유럽의 종교개혁자들이 ‘오직 성경’을 말했을 때, 그것은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가톨릭교회의 전통들, 예를 들면, ‘면벌부 판매’, ‘교황의 절대권력’, ‘성례전들’에 대한 비판이었지, ‘성경주의’를 말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믿어야 한다는 주장은 아니었습니다. 이런 ‘성경주의’는 종교개혁 이후에 발전한 ‘근본주의’의 입장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저자들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주장은 성경이 일점일획도 오류가 없으니(무오설), 문자대로 믿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고등학교시절 전도를 받아 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지만,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산상수훈의 말씀이 가장 지키기 힘들었습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사람은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를 범하였다. 네 오른 눈이 너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거든 빼서 내버려라”(마 5:28∼29). 정말 눈을 빼야 하는지 새벽기도 시간마다 괴로워했습니다. 말씀대로 살지 못하니, 영원한 죄책감과 죄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했고,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기쁨과 충만함은 느낄 수 없었습니다. 저를 더욱 절망시킨 것은 남자 신도 가운데 눈을 스스로 뺐다는 사람을 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말씀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은혜로’, ‘말씀 안에서’ 사는 것이 복음적이란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동성애 문제를 둘러싸고 교회만이 아니라 한국사회 전체가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입장의 차이로 논쟁이 있을 수 있지만, 문제는 성경이 동원되고, 정치적으로 세력화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 안에 동성애에 대한 비판적인 증언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에는 어떤 이유로도 사람을 차별하거나 배제하거나 축출하는 것은 사랑이신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복음의 정신에도 어긋난다는 증언들도 있습니다. 문제는 어느 편을 선택하든지 그것이 ‘내로남불’적 성경해석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고, 내가 하는 성경해석이 절대적으로 옳고 다른 성경해석은 절대적으로 틀리다는 주장은 자가당착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내게 유리한 것만 받아들이고, 불리한 것은 외면하거나 피해가는 것은 성령을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고후 3:6). “주님은 영이십니다.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고후 3:17)는 사도 바울의 말씀에도 부합하지 않습니다.
채수일 경동교회 담임목사
[바이블시론-채수일] 내로남불과 성경
입력 2017-09-21 17: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