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어두운 골짜기에 비치는 부활의 빛

입력 2017-09-21 00:01
칼 바르트
“누군가 요제프 K를 모함했음이 분명하다. 나쁜 짓을 하지 않았는데도 어느 날 아침 체포되었으니 말이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소송’의 시작을 알리는, 강렬하지만 찝찔한 문장이다. K는 자신의 죄목도 모른 채 무죄를 증명해야 하는 부조리 상황에 부닥쳐 있다. 무죄를 밝히고자 K는 1년간 이곳저곳을 다니고 이 사람 저 사람도 만난다. 그럴수록 일상의 구석구석이 그를 심판하는 법정의 연장이라는 것이 폭로된다. 하지만 자신이 무죄라 굳게 믿는 K는 소송이 마치 자기와는 무관한 것처럼 그 일상을 아무 일 없듯 살아간다.

K가 속한 세상처럼 우리 삶의 지평도 위기와 모순으로 가득하고, 그 뿌리에는 심판의 도끼가 놓여 있다. 그러나 K처럼 현실의 인간은 임박한 경고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무덤덤하게 살아간다. 삶의 실상을 보지 못하게 우리 눈은 어두워졌고, ‘다 잘될 거야’라는 근거 없는 말에 귀가 기울어져 있다. 스위스 개혁주의 신학자 칼 바르트의 ‘로마서’는 이러한 삶의 태도에 경종을 울리는 책이다. 자신이 곤경에 빠져 있음을 인식하지도 못하고 자기 힘으로는 그 현실을 벗어날 수도 없음이 나와 너의 실상임을, 바르트는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인다.

20세기 초 유럽은 19세기를 지배했던 역사의 진보와 인류 계몽이라는 이데올로기가 가져온 파국을 철저히 경험했다. 정치·경제적 불안은 제1차 세계대전과 볼셰비키 혁명 등의 세계사적 사건으로 표출되었고, 그 이면에는 수많은 이름 모를 가난한 노동자와 이주민, 난민 등의 눈물과 피가 있었다. 역사의 폐허 위에서 새로운 진보를 일으키고자 모두가 분주할 때, 로마서를 읽으며 바르트는 카프카처럼 질문했다. “지금 우리는 하나의 혐의 아래 기소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 우리는 하나의 재판을 받고 있는 것 아닐까?”(929쪽) 각기 다른 비전과 프로그램을 가지고 경쟁하는 사람들 한가운데서 바르트는 전도서의 한 구절이야말로 인류가 들어야 할 한마디라고 외쳤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102쪽)

바르트는 삶의 진정한 가능성은 인류의 진보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환상이 파괴되는 지점에서 발견될 수 있고, 이를 위해서는 역사가 언제나 ‘위기’, 즉 심판의 그림자 아래에 놓여있음을 직시해야 함을 예언자적으로 포착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죽음으로 경계 지어진 이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부정으로, 부활을 심판과 죽음 저편에서 비치는 그분의 긍정으로 파악했다. 즉, 현실 세계 너머의 초월적인 분임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이 세계의 운명을 마주하고 참여하신다.

“하나님은 자신과 함께 ‘믿음의’ 모험을 감행하려는 사람에게 자신이 어떤 분인지를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아니요’를 제 어깨에 짊어지고 가려는 사람, 그 사람을 하나님의 더 크신 ‘예’가 안고 가신다… ‘예와 아니요 사이의’ 그 모순을 회피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안전히 거한다.”(166쪽) 바르트는 인류의 희망과 역사의 가능성을 바로 이 지점에서 찾아 나가야 함을 바울의 로마서 한 구절구절과 씨름하며 보여주려 했다.

제대로 된 박사학위도 없던 시골 동네의 젊은 목사가 쓴 ‘로마서’는 출판되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로마서’는 19세기 유럽의 부르주아 문명과 개신교의 결탁에 대한 공격으로서, 종교개혁 유산에 대한 현대적 재발견으로서 주목을 받았다. 또한 바울의 편지에 대한 ‘신학적’ 글이지만 이 책은 곧 고전 텍스트를 읽어내는 새로운 해석학의 시발로서, 힘의 논리에 중독돼 있던 현실 정치에 대한 비판으로까지 추앙되었다. 머지않아 바르트의 ‘로마서’는 누구나 인정할 만한 20세기 대표적 신학책으로 자리매김했다. 이 책은 인간성과 세상 됨을 가식 없이 응시하는 법을 배우게 하며, 신앙이 삶의 문제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발견하는 것을 도와주며, 현실의 어두움이 아무리 짙더라도 부활의 빛은 그보다 더 강렬하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시대와 지역, 언어의 경계를 뛰어넘는 대표적 개신교 고전이다.

이번에 한국어로 출판된 ‘로마서’는 1124쪽에 달하는 대작이지만, 꼼꼼한 번역과 충실한 해설 덕분에 난해한 바르트의 글을 큰 어려움 없이 접할 수 있게 해준다. 오늘날 신앙과 교회가 왜 필요한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거나 이 땅에 여전히 희망이 있냐고 질문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곱씹으며 읽어보기를 권한다.

김진혁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김 교수 약력=△연세대 신학과 △하버드대 목회학 석사 △영국 옥스퍼드대 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