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주의 심리학을 제창한 미국의 심리학자 마슬로우(Maslow)는 인간의 욕구 단계설을 주장하면서 생존과 안전에 대한 욕구를 가장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욕구로 분류했다. 그런데 소방관은 그러한 인간의 본성을 역행해 살아가야 한다. 화마(火魔)가 자신의 생존을 위협할 때, 다른 이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존경해야 하고, 그들이 우리의 생명을 보호해 주듯 우리는 그들을 기억하고 보호해야 한다. 하지만 안전의 대명사인 소방관들의 순직이 반복되고 있다. 최근 강원도 강릉 석란정 화재현장에서 정년을 1년 남짓 남긴 소방관과 경력 1년 미만의 소방관이 순직했다.
소방관 순직이 되풀이 되는 것은 안전한 국가를 지향하고 국민의 생명을 존중하는 정부의 최우선 목적에 반하는 일이다. 이번 순직이 소방관에게 일방적인 희생과 봉사를 요구해 온 후진적인 체제를 개편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우선 무엇이 문제인지 원인을 분석하는 작업이 있어야 한다. 화재가 발생하면 물을 뿌려서 진화한다. 물을 흠뻑 먹은 노후 건물은 무너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화점을 찾아서 건물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사고가 발생하곤 한다. 진압방식을 바꾸는 정책 개발이 필요하고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 안전의 기능은 제도, 장비, 기술 그리고 인간의 협력에 의해 작동된다.
화재 진압의 과학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경청할 필요가 있다. 현재 소방 조직은 광역정부 소속으로 돼 있는데 시장과 도지사가 소방 인력이나 장비 확충에 적극적이지 않다. 일자리 확대를 강조하는 문재인정부에서 소방관 인력 확충은 우선돼야 한다. 특히 소방 장비나 시설과 관련해서는 중앙정부의 역할이 강화돼야 한다. 소방행정업무 분석을 통해 불필요한 업무를 줄임으로써 인력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방안도 모색해야 한다. 또 현장 인력 배치 기준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런 연장에서 여성 소방공무원에 대한 근무 여건 검토를 병행해야 할 것이다.
위험을 회피하려는 인간의 본능을 거스르면서 일을 해야 하는 소방관은 오랜 훈련과 연습으로 행동이 습관화돼야 하고, 긴박한 현장에서 순간적인 판단 역시 빨라야 한다. 그럼에도 인력부족으로 인해 훈련시간을 확보하는 것은 사치이고 휴식시간조차 갖기 힘든 게 현실이다. 전국에 30년 이상 노후화된 소방서 청사가 적지 않다. 리모델링해 그 안에서 학습과 훈련 그리고 휴식이 동시에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
순직도 안타깝지만 소방공무원들의 일상적인 건강도 우려되는 부분이다. 전문가들은 소방공무원들이 위험하고 불규칙적인 근무환경에서 외상후 스트레스장애, 우울증, 수면장애 등 한 가지 이상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소방공무원들이 자신도 모르게 찾아오는 심리적·정신적 질병으로부터 온전히 보호받을 수 있도록 소방공무원들에게 특화된 전문병원을 설립하는 것도 시급하다고 하겠다. 국군병원, 보훈병원, 경찰병원은 있지만 소방병원은 없다. 소방공무원은 일부 국가직을 제외하고는 대다수가 지방직 공무원이라 동력을 받지 못하고 있다. 소방청이 신설된 만큼 소방병원 설립을 적극 추진할 필요가 있다.
소방관들이 암송하는 ‘소방관의 신조’ 중에 “제 사명을 충실히 수행케 하시고, 최선을 다할 수 있게 하시어 모든 이웃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지키게 하소서. 그리고 당신의 뜻에 따라 제가 목숨을 잃게 된다면 당신의 은총으로 제 아이들과 아내를 돌보아 주소서”라는 문구가 있다. 나의 안전을 담보해 주는 분들의 숭고한 정신을 공유해야 한다. 가장 힘든 순간에 정작 자신들은 도움을 받지 못하고 순직한 고 이영욱 이호현 소방관의 명복을 기원한다. 이제 신의 은총이 아니라, 정부의 정책과 시민의 관심으로 그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나서야 할 때다. 정부는 구체적인 정책으로 답을 해야 한다.
이원희 한경대 행정학과 교수
[시사풍향계-이원희] 순직 소방관을 위한 약속
입력 2017-09-20 17:24 수정 2017-09-20 21: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