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반 급우들의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출발선에 선 내가 정말 달릴 수 있나 한번 지켜보자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옆에 서 있던 선생님이 갑자기 앞으로 달려 나가시는 게 아닌가. 뒤뚱거리며 뛰시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
헉헉 숨을 몰아쉬면서 다시 내 앞으로 달려오신 선생님이 말했다. “뛰어!”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다시 한 발을 내밀었다. 내 인생 최초의 달리기였다. ‘나도 뛸 수가 있구나.’ 한참을 지나서야 겨우 출발선으로 되돌아왔는데, 그 앞에서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나를 부축하려 했다. 그러자 선생님이 벼락같은 소리를 질렀다. “절대 도와주지 마.” 억지로 몸을 일으켜 절뚝거리며 출발선을 넘어 들어오자 선생님이 나를 와락 끌어안으셨다.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철륜아! 너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 용기와 힘을 주던 선생님의 말씀이 지금도 귓가에 맴돈다. 분명 하나님께서 선생님을 통해 베푸신 ‘소아마비의 은총’을 경험케 하신 일이리라.
그 은총의 경험은 지금도 누리고 산다. 계단 오르내리는 일은 여전히 내게 힘들다. 지하에 있는 우리 교회 예배당에 드나들 때면 교인들이 나를 양쪽에서 부축해준다. 대학교수 시절, 4층 강당에 가기 위해 계단을 오를 때면 남녀 학생 가릴 것 없이 양쪽에서 나를 부축해줬다.
양쪽에 서서 나를 부축하는 학생들 목에 내 양팔이 걸쳐지면 마치 물지게를 지고 고개를 건너듯 학생들은 힘차게 계단을 오른다. 어떨 땐 하늘로 들려 올라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매일 반복되는 이런 일상을 36년 동안 동행해준 학생들에게 감사와 사랑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중학교 교사인 아버지가 근무지를 옮길 때마다 이사를 했다. 경북 영덕군 영해에 살 때였다. 중학교 때였는데, 내 신앙의 성장기라 할 수 있다. 3년 동안 영해교회 종지기를 했다. 매일 새벽예배 전에 치는 종부터 수요집회, 목요학생집회, 토요청년집회와 주일예배에 이르기까지 일주일에 적어도 열두 번의 종을 쳐야 했다.
한 번은 ‘새벽예배 전인 오전 4시30분에 꼭 종을 쳐야 한다’는 부담 때문인지 무심코 잠에서 깨어 교회로 달려가 종을 쳤는데, 자정이었다. 뜬금없는 교회 종소리에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던 목사님과 장로님들이 잠옷 차림으로 달려 나온 일도 있었다.
종을 치면서 늘 찬양을 불렀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교회 종지기 일이 교회 음악가로 키운 숨은 동력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또 하나는 학교에서 음악 선생님이 음악 공부를 독하게 시켰는데, 나에겐 큰 도움이 됐다. 선생님의 교수법은 특별했다.
일례로 선생님은 “선생님의 애인 이름이 ‘라미’씨인데, 그녀는 파도소리가 나면 온다”라는 문장을 설명하면서 “파도소리에 라미씨가 오더라”라고 외우도록 가르쳤다. 이건 곧 ‘파도솔레라미시’, 높은음자리표가 붙는 순서였다. 이런저런 방식으로 열정을 다해 가르쳐 주던 음악 선생님 덕분에 중학교 시절, 찬송가 정도는 얼추 작곡할 수 있을 정도였다.
교회 종지기를 하면서 찬양과 음악 공부에 푹 빠져 있는 시절도 잠시, 집안 사정이 너무 좋지 않아 여섯 식구가 흩어져야 했다. 어머니는 나를 서울로 보내셨다. 장애를 가진 몸으로 상경한 나에게 안식처라고는 교회 말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정리=박재찬 기자 jeep@kmib.co.kr
[역경의 열매] 김철륜 <2> 중학생 때 일주일에 열두 번 교회 종 쳐… 신앙 쑥쑥
입력 2017-09-22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