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수 헌법재판소장 후보자 임명동의안이 최근 국회에서 부결되자 청와대와 여당은 야당을 강력히 비판했다. 청와대는 즉각 “헌정질서를 정치적이고 정략적으로 악용한 가장 나쁜 선례”라며 불쾌감을 표시했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국민의당을 향해 ‘뗑깡’(추미애 대표), ‘적폐연대’(우원식 원내대표)라고 공격했다. 청와대와 여당으로선 결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며 격앙된 반응이었다. 착각이다. 문재인정부 출범 이후 인사 문제가 곳곳에서 허점을 드러내면서 이미 여론이 악화되는 등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정치적 구도도 만만치 않았다. 오히려 청와대와 여당이 ‘설마’하며 안이하게 대응한 측면이 없지 않다. 여소야대 상황에서 보수야당은 이념적으로 절대적인 반대 입장을 밝혔다. 특히 호남을 기반으로 한 국민의당의 지지도 장담할 수 없었다. 국민의당은 그동안 주요 국면에서 ‘민주당 2중대’ 소리까지 들으며 새 정부 출범을 거들어줬다. 하지만 청와대와 여당으로부터 철저히 무시당하고 공격당하며 내심 불편한 감정이 쌓였다. 당 내부 문제까지 불거지면서 지지도는 바닥을 쳤고 존재감 자체가 희미해졌다. “국민의당이 국회 의사결정권을 가지고 있다”는 안철수 대표의 말에는 여러 가지 함의가 있다.
김명수 대법원장 후보자 임명동의안 국회 처리 문제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유엔 총회 참석 차 출국을 하루 앞둔 17일 “발걸음을 무겁게 한다”면서 김 후보자 인준을 호소했다. 소통 부족을 인정하며 야당의 협조를 당부했다. 민주당 추 대표도 18일 뒤늦게 ‘뗑깡’ 발언을 사과하며 국민의당에 손을 내밀었다. 사법부 수장 공백은 헌정 사상 초유의 사태로 발생해서는 결코 안 된다는 입장이다. 실제로 부결되면 엄청난 후폭풍이 예상된다. 하지만 단순히 여론 호소 전략에 그칠 경우 상황은 또 장담할 수 없다. 좀 더 적극적이고 낮은 자세로 계속 야당을 설득하는 작업에 나서야 한다.
문재인정부 성패는 사실상 야당의 협치를 얼마나 이끌어 내느냐에 달려 있다. 실제로 노동, 복지 관련 민생법안과 재벌개혁 등 야심차게 추진하는 대부분의 정책도 국회에서 관련 법안이 통과되지 않으면 사상누각이 된다. 야권 한 중진의원은 “문재인정부와 여당이 높은 지지율 환상에 빠져 바보가 돼 가는 느낌”이라고 지적했다. 국민의당은 물론 바른정당까지 충분히 설득이 가능한 여러 정치적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정부·여당이 제 역할을 못하고 있는 상황을 빗댄 말이다. 높은 지지율만 믿고 대중적 감성으로 밀어붙이거나 ‘내로남불’식 자만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정부 정책이 완결성을 높여가려면 대척점에 서 있는 자유한국당까지 적극 설득할 필요가 있다.
문재인정부에서 가장 혹평을 받으며 큰 아킬레스건으로 부각된 외교·안보 문제도 국내적으로 한목소리가 나오도록 야권의 협력을 최대한 이끌어 내야 한다. 북한 문제가 국제사회 최대 골칫덩어리로 떠오른 상황에서 미국과 중국, 일본은 최근 상호 급박하게 협상에 나서고 있다. 동맹이든 적대국 관계이든 국제사회에서 모든 협상은 자국이익이 최우선이다. 한반도 문제에 있어 미국이나 일본, 중국이 우리 입장을 조금이라도 먼저 고려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런 의미에서 코리아패싱 가능성도 결코 가볍게 볼 수는 없다. 북한이 자칫 우리 민족끼리를 생각하고 행동한다고 착각해서도 안 된다. 정부가 아무리 대북 유화 제스처를 내놓고 대북지원 방침을 밝혀도 핵실험을 계속하고 미사일을 발사하는 것을 보면 미국과의 직접 협상을 전제로 제 갈 길을 가겠다는 의미다. 문재인정부 출범 이후 잇따라 유화적인 대북정책을 발표했다가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은 이를 방증한다.
절대다수 국민의 지지를 받으며 출범한 문재인정부 허니문 기간도 끝나가고 있다. 정권 초 80%를 웃돌던 문 대통령 지지율은 어느덧 60%대까지 떨어졌다.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한방에 훅 갈 수 있다.
오종석 편집국 부국장 jsoh@kmib.co.kr
[돋을새김-오종석] 착각의 함정에 빠지지 마라
입력 2017-09-18 17: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