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발레 ‘지젤’] ‘스물일곱 젊음’을 압도한 ‘서른여덟 연륜’

입력 2017-09-17 21:42
발레 ‘지젤’ 2막에서 지젤(김세연)이 무덤을 찾아온 연인 알브레이트(최영규)와 사랑의 춤을 추고 있다. 마포아트센터 제공

젊음이 아니라 연륜이 이긴 무대였다. ‘낭만 발레의 꽃’으로 불리는 ‘지젤’은 ‘호두까기 인형’만큼이나 무대가 잦은 고전 발레의 대표작. 발레리나로서는 정점을 지나 황혼으로 접어든 나이인 38세의 김세연이 주역을 맡은 이번 지젤은 두고두고 회자될 정도로 뭉클한 감동을 남겼다.

마포문화재단이 창립 10주년을 맞아 자체 제작해 지난 15, 16일 마포아트센터에서 선보인 지젤은 해외에서 활동 중인 남녀 스타 무용수를 기용해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언론의 관심은 남자 주인공 알브레이트를 맡은 최영규(27)에 더 쏠렸다. 스페인 국립무용단 수석무용수 김세연도 스타성은 있지만 은퇴가 멀지 않는 나이. 그래선지 2011년 보스톤 국제콩쿠르 금상을 받으며 가장 핫한 무용수가 된 네덜란드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최영규가 더 부각됐다.

정작 무대에선 나이를 초월한 격정이 힘과 젊음을 이겼다. 전혀 상반된 연기를 펼쳐야 하는 1막과 2막에서 소름 끼칠 정도로 완벽한 변신을 하며 혼을 불사른 지젤에 관객은 눈을 떼지 못했다. 1막에서 순박한 시골 소녀 지젤은 신분을 속이고 나온 귀족 알브레이트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그가 신분의 차이는 물론 약혼녀까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미쳐서 죽고 만다. 2막에서 죽어서 ‘윌리’가 된 지젤이 생전의 사랑을 잊지 못하고 죽음의 위기에 처한 알브레이트를 구한다.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비극적 러브 스토리이다.

지금까지 수도 없이 지젤 역을 해온 김세연. 이번 무대에서는 최영규가 자신보다 11살이나 어린 데다 그해 가장 촉망받는 무용수에게 주는 네덜란드 국립발레단의 ‘알렉산드라 라디우스’ 상까지 받은 직후라 부담을 느낀다고 했다. 그런 말이 엄살 이기라도 한 것처럼 김세연은 무대를 압도했다. 1막에선 나이가 무색할 만큼 발랄했고, 알브레이트 귀족 약혼녀가 입은 멋진 드레스의 옷감에 볼을 비벼댈 때는 천진했고, 머리를 풀어헤치며 미쳐갈 때는 처연했다. 2막에서 살아있는 알브레이트에 닿을 듯 말 듯 닿지 못할 때의 안타까움은 객석으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몸의 언어는 풍부하면서도 오랜 훈련의 산물처럼 단호했다. 더 큰 무기는 마지막 지젤을 추기라도 하듯 뜨겁게 연기한 진정성이었다. 고대 그리스 ‘라오콘’ 조각을 연상시키는 근육의 젊고 힘찬 최영규의 춤조차 조연으로 비칠 정도였다.

소박한 농촌 풍경, 푸른 달빛 교교한 숲 등 회화적인 느낌의 무대도 감동을 더하는 요소였다. 1막에서 조연들의 군무가 약한 걸 빼면 의상과 안무도 신선해 한차례 공연으로 종료되기는 아쉬움이 컸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