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강남역에서 열린 ‘미용업소 살인 공론화 집회’는 한 온라인 카페에서 시작됐다. 홀로 운영하던 미용업소에서 여성이 살해당한 사건이 알려지자 순식간에 “수많은 여성이 일상에서 위험에 노출돼 있다”며 다수의 여성들이 집결했다. 집회 준비 비용 370만원이 하루 만에 모였고 실제 집회에 100여명이 참석했다.
영화 VIP의 여성혐오 논란도 비슷했다. 영화 속 여성들이 강간·살해당하는 모습이 지나치게 폭력적이고 선정적이라는 평이 지난달 말 SNS에 올라오면서 여성 커뮤니티로 확산됐다. 후기를 접한 여성들은 영화 관람 거부에 나섰다. 영화는 감독의 전작 ‘대호’ ‘신세계’의 성적에 크게 못 미치는 누적 관객수 137만여명(14일 기준)을 기록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넘나드는 여성들의 연대가 사회를 바꾸고 있다. 뚜렷한 조직은 없지만 스마트한 운동방식과 적극적인 행동으로 사회가 그동안 무시해 온 여성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게 만들고 있다.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15일 “여성들이 차별이나 폭력을 민감하게 인식하게 됐기 때문”이라며 “(같은 현상이) 문제로 보이고 말고의 차이”라고 설명했다.
여성 건강 문제를 수면위로 올린 생리대 파동이 대표적이다. 시민단체의 실험결과가 나온 지난 3월에도 큰 관심을 끌지 못했지만, 수많은 여성이 자신의 부작용 경험과 불안을 공유하며 이슈를 만들어냈다. 실험을 진행했던 김만구 강원대 교수는 “(그동안) 우리 사회는 여성 건강에 관심이 없었다”고 비판했다.
영화 VIP를 계기로 불거진 영화 속 폭력 문제도 새로운 이슈는 아니었다. 여성만이 느꼈던 불편함이 사회적 이슈로 공론화되자 해당 영화감독은 “젠더 감수성이 부족했다”고 말했다.
인식의 전환은 언제 이뤄진 걸까. 전문가들은 2015년 초 SNS에서 확산됐던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운동과 지난해 5월 강남역 살인사건 추모집회에 주목한다. 2015년 2월 한 칼럼니스트의 ‘IS(이슬람국가)보다 무뇌아적 페미니즘이 더 위험해요’라는 제목의 글이 논란이 되면서 트위터에서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선언이 유행처럼 번졌다. 윤김지영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교수는 “페미니스트라는 이름이 일종의 낙인처럼 여겨지다가 대중적으로 ‘나는 페미니스트다’라고 선언하는 운동이 이뤄지면서 여성혐오에 저항하는 성격으로 변모했다”고 분석했다.
강남역 살인사건 추모집회는 온라인 논의를 오프라인 광장으로 확장시키는 기회를 제공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마경희 연구위원은 지난 7월 양성평등정책포럼에서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페미니즘 리부트(재시동)라고 할만큼 2030 여성들의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과 참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고 진단한 바 있다. 윤김 교수는 “(과거에는) 페미니즘 관련 수업을 열면 정원이 차지 않아 폐강되곤 했는데 지금은 정원이 넘어 증원 요청을 하기도 하고 (학생들이) 페미니즘 소그룹을 만들어 지도교수 신청을 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나영 교수는 “지금의 젊은 페미니스트는 성장과정에서 교육이나 여성운동을 통해서 의식화된 게 아니고 일상 속 여성차별이나 폭력을 민감하게 인식하면서 등장했다고 볼 수 있다”며 “기존 여성단체 등의 관심과 지원이 이어지는 만큼 조직화되고 지속될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했다.
글=임주언 기자 eon@kmib.co.kr, 그래픽=이석희 기자
[기획] 온라인 넘어 오프라인으로… 커지고 세진 여성 목소리
입력 2017-09-16 0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