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적인 삶’ vs ‘타협하는 삶’… 연극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 리뷰

입력 2017-09-18 05:00 수정 2017-09-19 17:43
연극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에서 엘레나 선생님이 랄랴와 대화하고 있다. 아이엠컬처 제공
엘레나 선생님과 대화하는 발로쟈. 아이엠컬처 제공
랄랴를 감싸는 빠샤. 아이엠컬처 제공
누구나 달콤한 인생을 꿈꾼다. 하지만 달콤한 인생을 추구하는 방식이 누구나 같진 않다. 도덕과 신념을 지키려 애쓰는 사람. 어떤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 목적을 달성하려는 사람. 두 길을 놓고 끊임없이 고민하는 사람. 이들은 동시대 같은 사회에서 만나 갈등을 빚는다. 어느 나라에서나 시대에서나 ‘양심적인 삶’과 ‘타협하는 삶’은 서로 충돌해왔다.

최근 무대에 오른 연극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은 이런 사회의 모습을 압축해 보여준다. 희곡은 1980년 구소련 당시 라트비아 출신 작가 류드밀라 라주몹스카야가 썼다. 신념을 지키려는 엘레나 선생님(우미화)의 집에 우등생 발로쟈(박정복 강승호)와 도스토옙스키를 공부하는 철학과 지망생 빠샤(오정택), 열등생 비쨔(신창주), 성공을 위해선 사랑도 버릴 수 있다고 믿는 여학생 랄랴(이지혜)가 성적을 고쳐달라고 찾아오면서 극은 시작한다.

학생들은 시험지를 보관한 금고의 열쇠를 찾아 성적을 조작하기 위해 선생님과 대립한다. 이들에게 도덕은 구시대 골동품이다. 심지어 선생님의 집을 뒤지고 몸을 수색하기에 이른다. “인생이란 게 원래 비열한 거잖아요. 순결도 계산해서 잃을 거예요.”(랄랴) “도덕은 극히 인간적 카테고리예요. 그래서 상대적이고요.”(발로쟈) “역사는 시대의 위선자를 처단한 모든 사형집행자를 기억할 거예요.”(빠샤) “지금 시대에 무슨 이상요, 민족은 또 뭐고요?”(비쨔)

도덕을 강조하는 엘레나 선생님을 ‘선’, 이득을 좇는 학생들을 ‘악’이라 단순히 단정할 수 없어 불편하고 혼란스러운 느낌이 들기도 한다.

배우 우미화는 지난 14일 기자회견에서 “당연히 옳은 가치를 옳지 않다고 여기는 이들이 많은 건 기성세대가 그런 삶을 보여줬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젊은 세대가 양심을 지키지 않아도 사회적으로 잘 사는 기성세대를 많이 봐 와서 그렇다는 뜻이다. 연출가 이재준은 “심정적으로는 학생들이 틀렸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누가 옳고 그른 것인지는 보는 관객에 따라서 모두 다르게 느낄 수 있다. 답을 주지 않고 질문하고 싶었다”라고 답했다.

극 중 유독 다른 캐릭터가 있다. 바로 발로쟈다. 발로쟈는 스스로 잘못했다는 것을 깨달아가는 친구들과 달리 내적 갈등을 겪지 않는다. 시종일관 강한 힘을 추구한다. 발로쟈가 얻길 원하는 힘은 “상황을 자유롭게 움직이고 타인의 운명을 손에 쥐는 능력”이다. 그러다 보니 다른 학생들과는 달리 열쇠를 얻어 성적을 조작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 오로지 목표를 달성하는 것 자체가 목표다.

이 역할을 맡은 배우 박정복은 “사이코패스가 아니라 있을 법한 캐릭터로 보이고 싶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은 생각보다 우리 주변에 너무 많더라”고 털어놨다.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은 81년 구소련 초연 당시 구시대의 몰락과 혼란스러운 이데올로기를 그린다는 이유로 공연이 금지됐다. 하지만 독일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 유럽 전역으로 퍼져 연극계를 뒤흔들었다. 국내에는 5년 만에 되돌아왔다. 2007년 초연을 시작으로 2009·2012년 무대에 올랐다. 양심을 지키며 살 것인가, 비열하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다음 달 15일까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3관. 전석 4만원.

권준협 기자 ga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