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여성 총리에 女權은 제자리… 獨 메르켈의 역설

입력 2017-09-16 05:00
독일 총선을 열흘 앞둔 14일(현지시간) 에센주에서 자전거를 탄 시민이 앙겔라 메르켈 총리(왼쪽)와 사회민주당 마르틴 슐츠 당수의 대형 선거 포스터 앞을 지나고 있다. 메르켈 총리 포스터에는 ‘독일의 성공을 위해’, 슐츠 당수 포스터에는 ‘(사회가) 더 공정해져야 한다’는 글씨가 쓰여 있다. AP뉴시스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지도자가 12년 동안 이끌었던 독일. 어느 나라보다 남녀평등이 실현돼 있을 것 같지만 착각이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2005년 처음 총리가 됐을 때 9세였던 크리스틴 아우프 데어 마시(21·여)는 남성 총리가 이끄는 독일을 상상하기 힘들다. 생각할 수 없는 게 하나 더 있다. 바로 자신이 견습생으로 일하는 풍력에너지 회사의 여성 임원이다. 그는 “독일에서는 나와 같은 처지의 여성과 메르켈만 있을 뿐 그 사이에 다른 여성은 없다”고 말했다. 유명 페미니스트 알리체 슈바르처는 “2005년 이후 여자아이들은 장래에 헤어디자이너가 될지, 아니면 총리가 될지만 결정할 수 있게 됐다”고 비꼬았다. 뉴욕타임스(NYT)는 “메르켈은 전 세계 페미니스트가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성취를 거뒀지만 정작 독일 여성의 지위는 발전이 없었다”면서 ‘이상한 모순’이라고 14일(현지시간) 지적했다.

각종 통계 수치에서도 독일 여성의 지위는 그대로 드러난다. 올브라이트재단 조사를 보면 독일 160개 상장사의 이사회 멤버 중 93%는 남성이고 4곳 중 3곳에는 아예 여성 임원이 없다. 독일 경제의 핵심인 미텔슈탄트(중소기업)의 경우 여성 임원은 4%에도 미치지 못한다. 성평등 지표인 남녀 임금격차 수준(2015년 기준)은 여성이 남성보다 21.5%나 낮다. 유럽연합(EU) 회원국 평균 16.3%보다 훨씬 낮다. 여성작가 안네 비조렉은 “메르켈 때문에 밖에서 보는 독일의 이미지는 진보적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특히 일하는 여성에 대한 편견은 아직도 독일 사회에 뿌리 깊이 박혀 있다. 독일에서 여성은 직장 없이 아이만 키우면 사회에 공헌하지 못한다는 핀잔을 듣고, 아이를 갖고 일하면 ‘까마귀 엄마’(아이를 방치하고 일하는 엄마)라고 욕을 먹는다. 또 아이 없이 일한다면 냉정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세 아이 엄마로 회계법인 KPMG에서 근무하는 앙겔리카 후버스트라서는 “독일에서 여성으로서의 삶은 너무 힘들다”면서 “메르켈은 하나도 도움을 주지 못했다”고 말했다. 오히려 성평등을 외치면 “총리가 여성 아니냐”는 역공을 받기 일쑤다.

역사적 배경도 무시할 수 없다. 많은 아이를 출산한 여성에게 훈장을 줬던 나치 독일 이후 동독과 서독은 다른 길을 걸었다. 서독에서는 1977년까지 아내가 직장을 가지려면 남편 허락이 필요했지만 동독의 직장 여성은 1년의 유급 출산 휴가를 보장받았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 동독의 여성 취업률은 90% 가까이 됐지만 서독은 55%에 불과했다. 현재 독일 여성 취업률은 70%를 넘지만 3세 이하 아이를 둔 여성의 취업률은 12%밖에 안 된다.

NYT는 메르켈이 동독 출신에 아이가 없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전했다. 사회학자 유타 알멘딩어는 “메르켈은 서독에서 자란 많은 여성들이 비정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정상적이라고 여기고 있다”면서 “메르켈에게 성평등은 중요한 이슈가 아니다”고 말했다.

메르켈은 오는 24일 총선에서 4연임에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 이번 총선은 중도우파 기독민주당(CDU)과 기독사회당(CSU) 연합을 이끄는 메르켈과 중도좌파 사회민주당(SPD) 마르틴 슐츠 당수의 양자 대결로 압축된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인프라테스트 디마프가 14일 발표한 조사 결과 기독민주·기독사회당 연합의 지지율은 37%로 사민당 20%보다 17% 포인트 앞서고 있다.

맹경환 기자 khmae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