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장윤재]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고

입력 2017-09-14 17:32

결국 터질 게 터지고 말았다. ‘살충제 계란’ 사태로 많은 국민들이 계란을 두려워하게 됐다. 성서에 자식이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돌을 주고, 달걀을 달라고 하는데 전갈(독)을 줄 부모가 어디 있겠느냐는 예수님의 말씀이 나오듯(누가복음 11:11∼12) 지금 부모들 심정도 그러하리라. 그런데 과연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우리가 매일 먹는 음식은 ‘생명의 밥상’이 아니다. 다른 목숨을 학대해 차린 ‘죽음의 식사’다. 필자가 어릴 적엔 한 달에 한 번 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그 때는 한국 인구가 3000만 명이었다. 지금은 하루 세 끼도 모자라 간식까지 고기로 채운다. 인구는 그 사이 두 배 가까이 늘었다. 폭발적으로 증가한 육식 수요는 필연적으로 ‘공장식 축산’을 야기시켰다. 공장에서 물건을 찍어내듯 고기가 만들어진다.

간디는 “한 나라의 위대함과 도덕적 진보는 그 나라의 동물이 받는 대우로 가늠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느 정도 도덕적으로 진보했을까. 또 간디는 이렇게 물었다. “왜 사람들은 건물이나 예술작품과 같은 인간의 창조물을 파괴하면 ‘야만행위’라 비난하면서 신의 창조물을 파괴하면 ‘진보’라 치부하는가.”

동물도 신의 창조물이다. 성서는 말한다.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라’는 축복은 인간에게만 주어지지 않았다고. 같은 복을 동물들에게도 내리셨다.(창세기 1:22) 인간에게 땅을 ‘정복하고’ 땅 위의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신의 명령(창세기 1:28) 바로 다음에는 채식명령이 나온다. 인간에게는 씨 있는 채소를 먹으라고 하시고(창세기 1:29), 동물들에게는 풀을 먹으라고 하신다.(창세기 1:30) 노아의 홍수 이후 비로소 인간에게 육식이 허용되지만(창세기 9:3), 그것은 조건부, 임시적 허락이다. 우선 고기를 “피째 먹지 말라”(창세기 9:4)고 하신다.

유대인들은 피에 생명이 있다고 봤다. 피째 먹지 말라는 말은 동물을 학대해서 고기를 취하지 말라는 말이다. 이 조건부 육식 허락은 또한 임시적이다. 성서는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지으신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곳에서는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사야 65:25)이다. 태초의 채식의 질서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성서의 비전이다.

하나님은 동물을 인간의 먹거리로 짓지 않으셨다. 오히려 ‘돕는 배필’ 즉 반려자로 지으셨다. 아담을 지으신 다음에 그가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음을 보시고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시는데, 아담의 뼈로 이브를 짓기 전에 먼저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새를 지으신다.(창세기 2:18-19) 노아의 홍수 이후에 하나님이 맺은 무지개의 언약도 하나님-인간-동물(자연, 땅) 사이의 3자 계약이었다. 신학적으로 동물은 신 앞에서 인간과 동등한 계약의 주체자다.

이런 시각으로 성서를 봐야 하는 까닭은 오늘날 동물학대의 매우 큰 책임이 기독교에 있기 때문이다. 동물학대의 뿌리에는 서구의 이성 중심 사고와 이분법적 세계관이 깔려 있다. 이 세계관은 두 개의 전통에 연결돼 있는데 하나는 유대교이고 다른 하나는 고대 그리스 전통이다. 이 둘을 통합한 것이 바로 기독교이며, 따라서 동물학대의 문제는 곧 기독교의 문제가 된다. 학대는 ‘지각이 있는 생명체에 의도적으로 가하는 고통’이다. 모든 학대는 죄다. 동시에 신성모독이다. 온 생명을 지으시고 복을 내린 신의 섭리와 주권을 침해하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인권’이 있다면 동물에겐 ‘동물권’이 있다. 인권은 동물권으로 확대돼야 한다. 동물권은 또 생명권까지 확대되어야 한다. 우리의 어린이들을 생명에 대한 감수성을 가진 인간으로 키워야 한다. 다른 존재를 귀히 여기며 더불어 살아가는 마음을 길러줘야 한다. 뭍 생명과 함께 사는 ‘슬기로운 흙덩이’(호모 사피엔스)로 키워야 한다. 그 시작은 ‘소박한 밥상’을 차리는 것이다. 세상 어느 부모가 자식이 계란을 달라고 하는데 독을 주겠는가.

장윤재 이화여대 교목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