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굉장히 굳은 표정이셨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1일 수석보좌관회의를 주재하고 있었다. 회의 말미 헌법재판소장 후보자의 국회 본회의 표결 부결 소식이 전해졌다.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국민소통수석과 정무수석이 춘추관에 등장했다. ‘무책임의 극치’ ‘다수의 횡포’ ‘정략의 경연장’이라고 했다. 문 대통령 취임 이후 청와대가 쏟아낸 가장 거친 단어였다. 속마음은 제쳐두고 협치를 말하던 청와대가 4개월여 만에 왜 이리 달라졌을까.
문 대통령 취임사가 문득 떠올랐다. 연설문을 다시 꺼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여러분 감사합니다”로 시작됐다. 3144자의 취임사는 102개 문장으로 구성돼 있었다. 63개 문장이 “하겠다” “되겠다”의 약속형으로 끝났다. ‘대통령’이 가장 많이 등장했다. 34번이다. ‘솔직한 대통령’ ‘국민 눈물 닦아드리는 대통령’ ‘친구 같은 대통령’ 등 국민이 원하는 대통령상이 나열돼 있었다.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라는 문장은 여전히 가슴을 울렸다.
63가지의 약속은 지켜졌을까. 우선 인사다. 능력과 적재적소를 인사 대원칙으로 삼겠다고 했다. 5대 금지 원칙이 기준이었다. 그러나 총리에서부터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후보자까지 대부분 걸렸다. 반대가 거셌지만 선택은 정면돌파였다. 문 대통령은 취임 100일 회견에서 “역대 정권 통틀어 가장 균형있는 인사”라고 했다. 우리 사람이면 하자가 있어도 괜찮다는 독선이 느껴진다. 노무현정부 초대 정무수석인 유인태 전 의원조차 “벌써 오만한 끼가 보인다”고 개탄했다.
인사와 맞물려 있는 게 협치다. 후보자가 청문회 문턱에 걸릴 때마다 청와대는 야당 탓을 했다. 야당은 국정운영의 동반자라며 직접 나서 대화하겠다는 취임사의 약속은 잊힌 지 오래다. 당청 간의 오·만찬 소식은 들려와도 야당 지도자와 밥 먹었다는 기사는 찾아볼 수 없다. ‘우리끼리’ 소통만 있다. 주요 사안은 직접 언론에 브리핑하겠다는 다짐도 슬그머니 사라졌다. 정세균 국회의장마저 문 대통령의 협치를 낙제점으로 평가했다.
협치를 대신한 건 지지율이다. 지난 5월 한 여론조사에서 87%를 기록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85%를 뛰어넘은 역대 최고다. 최근 60%대로 떨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높다. 이를 방패삼아 신고리 원전 5·6호기 건설 중단, 최저임금 인상, 비정규직 제로 등을 불도저식으로 밀어붙이고 있다. 야당이 ‘지지율 독재’라고 비난하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여건이 조성되면 평양에도 가겠다”는 약속은 위기에 봉착했다. 북한은 취임 나흘 뒤 탄도미사일 발사를 시작으로 최근 6차 핵실험까지 감행했다. 문재인정부의 대화 손짓은 무시하고 있다. 미국과는 끊임없이 엇박자가 나고 있다. 중국 언론은 막말 수준의 비난을 쏟아내고 있다. 러시아 대통령으로부턴 면전에서 대북 제재 방안을 거절당했다. 운전석은커녕 차에 탑승조차 못하는 ‘코리아 패싱’ 우려는 확산일로다. 대화 환상만 좇는 오락가락 행보가 초래한 결과다.
문 대통령 임기는 2022년 5월 9일까지다. 1698일 남았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약속을 지킬 시간은 충분하다. 스스로를 돌아볼 시점이다. 정확하고 냉철한 국내외 현실 인식이 우선돼야 한다. 취임사에서 밝혔듯이 “잘못한 일은 잘못했다”고 하면 된다. “불가능한 일을 하겠다고 큰소리치지 않겠다”고 하면 된다.
지지율의 함정을 경계할 때다. 지지율이 높아도 인위적 정계 개편이 없으면 여소야대 국회와 3년을 같이 살아야 한다. 협치는 선택이 아닌 필수다. 부실검증을 초래한 인사시스템의 개선은 필요하다. 문 대통령은 자신의 말은 꼭 지키려는 강박관념이 있다고 한다. 좋은 자세다. 그러나 유연한 대응도 필요하다. “빈손으로 퇴임하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했다. 다른 의미로 사용되긴 했지만 지금 변하지 않으면 실제 아무것도 못하고 떠나는 대통령이 될 수 있다.
김영석 논설위원 yskim@kmib.co.kr
[여의춘추-김영석] 대통령 취임사를 다시 꺼내본다
입력 2017-09-14 1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