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우리 사회를 향해 ‘문명화’되었다고들 말한다. 그렇게 치하하는 사람들은 호롱불을 켜던 시절에서 전깃불을 켜는 시대로 ‘발전’했다고, 말을 타던 시절에서 자동차를 타는 시대로 ‘발전’했다고, 그러니 ‘세상 많이 좋아졌다’고 입을 모은다.
그러면서 여전히 호롱불을 켜거나(혹은 호롱불조차 켜지 못하거나) 말을 타고(혹은 걸어서) 이동하는 사람들이 ‘야만’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양 낮춰본다. 과연 그런가. 무엇이 ‘발전’이고, 또 어느 쪽이 ‘야만’일까.
인천 초등학생 살인 사건의 여파가 가시기도 전에 부산 여중생 집단폭행 사건이 터졌다. 서울에서도, 강릉에서도, 아산에서도 여중생 집단폭행 사건이 있었다는 뉴스가 속속 올라오고 있다. 이 정도면 전국 규모라 할 만하다. 황색 언론은 마치 물 만난 고기라도 되는 양 신이 나서 10대들의 잔인한 폭행과 살인방법을 반복해서 보여준다. 그에 따라 가해자에 대한 대중의 분노와 혐오도 극에 달해서 19세 미만 청소년에게는 무기징역이나 사형이 금지된 ‘소년법’을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그러면 다 되는 걸까. 어린 가해자들을 ‘사이코패스’로 치부하고 사회로부터 영구 격리하거나 제거해 버리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가. ‘그들’만 없어지면 ‘우리’끼리 안전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을까. 대명천지 ‘문명’사회에서 도대체 이런 ‘야만’스러운 일이 왜 끊이지 않고 일어나는가.
일본 오사카부립대학의 모리오카 마사히로 교수는 우리 사회를 ‘무통문명(無痛文明)’이라고 불렀다. 현대인은 자신의 고통을 무통화(無痛化)함과 동시에 타인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타인의 호소를 들으려 하지 않으며, 타인을 일방적으로 짓밟으면서도 자기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채지 못하는 ‘마비증’에 걸렸다는 것이다.
자기가 배고픈 것을 알아야 남의 배고픔을 아는 법이다. 자기가 아픈 것을 알아야 남의 아픔도 헤아릴 줄 안다. 그런데 물질의 풍요 속에 태어난 문명사회의 현대인은 배고픔을 느낄 새가 없다. 몸이 아프면 혼자 동굴 속에 들어가 끙끙 앓는 대신에 병원부터 찾는다.
의료산업이야말로 무통문명의 꽃이다. 몸속을 검사할 때도 ‘수면마취’라는 ‘문명’의 이기가 있으니 아플 걱정일랑 필요 없다. 수술 후 ‘무통주사’는 또 얼마나 고마운가. 아니다. 무통문명의 진짜 꽃은 따로 있다. 바로 ‘내 손 안의 스마트폰’. 언제 어디서든지 ‘클릭’ 한 번이면 원하는 쾌락이 곧바로 배달되는 편리한 ‘문명’의 이기다. 이 물건이 제공하는 무궁무진한 ‘콘텐츠’를 소비하노라면 마음이 아픈 것쯤은 금방 잊힌다.
이런 현대인의 모습을 모리오카 교수는 혼수상태에 빠져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사람에 비유했다. 그러고 보니 복음서에 왜 그토록 마비증 환자가 많이 등장하는지 알 것도 같다. 예수님 역시 그 시대를 향해 이렇게 탄식하셨다.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길까? 마치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서 다른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너희에게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을 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해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마 11:16∼17)
‘아몬드’라는 소설에 보면 ‘아몬드’라 불리는 뇌의 편도체 이상으로 아예 감정 자체를 잘 느끼지 못하는 열여섯 살 윤재가 자기와 너무 다른 곤이를 만나 우정을 쌓아가면서 점차 치유되는 과정이 아름답게 묘사돼 있다. 요컨대 소설은 ‘사이코패스’가 문제가 아니라 그를 둘러싼 관계망이 문제라고 넌지시 꼬집는다. 자신과 타인의 마음을 섬세하게 돌아보고 적절히 반응하도록 격려하는 생태계에서 어찌 ‘괴물’이 출현할 수 있으랴. 그러니까 ‘그들’을 욕하고 ‘그들’을 낳은 태를 비난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문명에 함께 몸담고 있는 한 시대의 죄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지금 우리는 이 문명의 낭떠러지 위에 함께 서 있다.
구미정(숭실대 초빙교수)
[시온의 소리] ‘무통문명’을 애도함
입력 2017-09-15 0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