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소리로 토해 낸 ‘트로이의 비극’… 세계가 전율

입력 2017-09-11 05:01
지난 7일 싱가포르 빅토리아극장 무대에 오른 국립극장 ‘트로이의 여인들’의 한 장면. 트로이 왕비 헤큐바(김금미·가운데)를 둘러싸고 여인들이 나라 잃은 슬픔과 분노를 노래로 표현하고 있다. 국립극장 제공
헬레네(김준수·앞)가 등장한 ‘트로이의 여인들’ 중 한 장면. 국립극장 제공
싱가포르 현지 관객들이 지난 7일 빅토리아극장에서 ‘트로이의 여인들’ 배우들과 제작진에게 박수를 보내고 있다. 일부 관객은 기립해서 환호성을 지르기도 했다. 국립극장 제공
한국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이 아시아 대표 축제인 ‘싱가포르예술축제(SIFA)’ 무대에 초청작으로 올라 현지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지난 7일 밤 싱가포르 빅토리아극장. 500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은 한국 배우들의 소리와 전통 악기의 음률이 맞물린 ‘악기들의 전쟁’에 숨 쉬는 것조차 잊은 듯 집중했다. 막이 내릴 때는 환호성과 기립박수를 장시간 쏟아내면서 화답했다. 좀처럼 박수를 길게 치지 않는 싱가포르 관객답지 않은 이례적인 반응이었다. 9일까지 3일간 진행된 공연은 연일 전석 매진되면서 높은 인기를 입증했다.

관객 미나 테이(50)는 공연이 끝난 뒤 “스토리를 모두 알고 봤지만 감정이 너무 강렬해 숨을 쉴 수 없었다”고 말했다. 티머시 창(17)은 “처음에는 낯선 창극의 방식에 적응해야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깊은 감정이 몰려왔다. 특히 배우들이 감정에 따라 목소리를 능수능란하게 조절하는 부분이 압권이었다”고 전했다. 대부분 관객은 현지인이었지만 공연을 볼 목적으로 한국에서 물 건너온 열성 관객도 있었다.

언론의 관심도 비상했다. 공연 내내 손과 고개를 움직이며 박자를 맞추던 현지 일간 더스트레이츠타임스 아크시타 난다 기자는 “가슴을 찢는 순수한 감정의 극”이라고 평했다. 더비즈니스타임스 헬미 유솝 기자는 공연 후 “문화부 기자로 10년 넘게 일했지만 창극 관람은 처음”이라며 “공연이 시작되자 음악의 마법에 빠진 기분이 들었고 음악 자체에 감정이 듬뿍 담긴 느낌을 받았다. 초보 관객들에게도 충분히 매력적”이라고 밝혔다.

국립극장과 SIFA가 공동 제작한 이 창극은 트로이가 그리스 스파르타 연합군과의 10년에 걸친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왕비 헤큐바(김금미), 딸 카산드라(이소연), 며느리 안드로마케(김지숙)를 비롯한 트로이의 여인들(서정금 등)이 승전국 그리스의 노예로 끌려가기 전 몇 시간의 이야기다. 특히 트로이를 무너뜨린 절세미인 헬레네 역을 ‘풍성한 금발 머리에 파란 눈동자를 지닌 여자’가 아닌 남자 배우 김준수가 맡아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김준수는 극 중 10∼15분가량 등장하지만 독보적인 존재감을 과시했다. 그는 공연 직후 “우리 소리가 가진 힘과 매력을 싱가포르 관객들에게 전해드려야겠다는 사명감으로 왔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특히 극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끌고 간 헤큐바와 코러스 선생님들이 리허설을 하실 때 관객이 돼서 지켜보다가 눈물을 쏟기도 했다”며 “이들의 힘과 열정에 나또한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털어놨다.

공연은 한국적이면서도 보편적이었다. SIFA의 예술감독으로 퇴직 전 마지막 작품을 맡은 세계적 연출가 옹켕센은 “나라 잃은 속에서도 당당히 맞서는 트로이 여인들 이야기를 연출하면서 한국 대학생들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 소녀상 앞을 밤새 지키던 모습을 생각했다”며 “권력자들이 권력을 갖지 못한 자를 어떻게 배신하는지와 그 후의 감정에 집중했다”고 설명했다. 이런 정서는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가 공감한다는 것이다.

‘트로이의 여인들’은 지난해 11월 국내에서 처음 무대에 올랐다. 이번 싱가포르 공연은 두 번째 공연이자 국제무대 초연이다. 옹켕센 연출과 김성녀 예술감독, 정재일 음악감독 등 제작진은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부수적 요소를 과감히 걷어내고 소리 본연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전하는 ‘미니멀리즘’에 집중했다. 하지만 첫 공연보다 극의 긴장감을 높이고 감정은 보다 절제하는 변화를 주기도 했다. 오는 11월 22일부터 12월 3일까지 열리는 국내 재연에서도 기본 골격은 유지된다.

‘트로이의 여인들’은 세계적 주목을 받고 있다. 내년 5월과 6월 영국을 대표하는 브라이턴페스티벌과 런던국제연극제에 초청됐다. 일본 호주 스페인 네덜란드 등의 예술·축제 감독들이 싱가포르로 와서 관람하기도 했다. 그리스에서 12시간을 날아온 카티야 아르파라 오나시스문화센터 예술감독은 “창극을 보면서 그리스 음유시인을 떠올렸다. 그리스 비극이 창극과 만나고, 한국의 전통이 해외 예술가와 만나 새로운 동시대성을 이뤄 놀라웠다”고 평했다.

싱가포르=권준협 기자 ga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