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젠트리 보고서] “상생협약 없는 도시재생, 건물주만 좋은 일”

입력 2017-09-08 05:04
낙후된 주택가였던 서울역 뒤편 중림동이 ‘서울로 7017’ 개장 후 들썩거리고 있다. 미용실, 카센터, 밥집들이 차지했던 중림로 양 옆 상가는 세련된 카페와 고급 음식점들로 빠르게 바뀌고 있다. 도시재생을 통해 동네가 환해지고 집값이 올라서 좋다는 사람들도 많지만 영세한 상인들과 서민들이 내몰리는 젠트리피케이션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최현규 기자

자동차들이 지나다니던 서울역 앞 고가도로를 사람들이 걷는 보행길로 리모델링한 ‘서울로 7017’은 도시재생사업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서울시는 서울로가 낙후된 서울역 인근을 부활시키는 핵심 시설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실제로 지난 5월 서울로가 개장된 후 인파가 몰리면서 주변 지역이 들썩이고 있다. 특히 서울역 뒤편 서울로의 시작점에 위치한 만리동과 중림동이 그렇다.

낡은 저층 주택들이 밀집한 중림동의 중심도로인 중림로 양 옆으로는 새로 생긴 카페나 음식점이 늘어나고 있다. 만리동으로 이어지는 만리재길도 마찬가지다. 만리재길에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지난달부터 입주를 시작했다. 분양가 7억원대였던 33평형 아파트는 ‘서울로 효과’ 때문인지 9억5000만원으로 올랐다.

이 동네 상가의 임대료도 크게 올랐다. 중림로에 위치한 ㅈ공인중개사무소에서는 이 거리에서 장사하던 미용실과 국밥집, 카센터 2곳이 늘어난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해 최근 떠났다고 말했다. 미용실 임대료는 300만원에서 370만원으로 올랐고, 400만원 하던 콩나물국밥집 월세는 600만원으로 뛰었다.

중개사무소 대표 최상배씨는 “건물주가 바뀌거나 임대료가 오르는 조짐이 보이니까 권리금이라도 챙겨야지 하면서 가게를 비워주는 경우도 있다”면서 “홍대나 경리단길 쪽에서 장사하던 사람들이 가게 자리를 보러 많이 찾아온다”고 전했다.

도시재생이 도시개발의 새로운 방식으로 자리잡고 있다. 도시재생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예산을 투입해 낙후된 구도심과 지역을 부활시키는 사업이다. 서울시는 2015년부터 사업을 시작해 현재 27곳에서 도시재생사업을 진행 중이다. 문재인정부는 앞으로 5년간 50조원을 투입해 전국 곳곳에서 도시재생 뉴딜사업을 시작한다고 밝혔다. 국토교통부가 이번 달 중 첫 사업 선정지를 발표할 예정이다.

도시재생은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하 젠트리)이라는 그림자를 동반한다. 도시재생은 동네에 활력을 불어넣을 핵심 수단인 앵커시설을 만들어주고 가로 정비나 방범시설 설치 등을 해주며 주민협의체 같은 주민 커뮤니티 활동을 지원하는 게 주요 사업이다. 동네가 살아나면 땅값이 오르고 건물 임대료가 오르는 게 당연하다. 그러다보면 중림로의 여러 상인들처럼 동네에서 내몰리는 사람들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도시재생에 성공한 지역일수록 더 극심한 젠트리가 발생한다.

‘8·2 부동산 대책’이 발표된 후 서울시는 도시재생사업 신규 지정을 잠정 중단했다. 당분간은 지금까지 진행해온 도시재생사업만 계속하겠다는 입장이다. 도시재생이 집값을 올리고 정부의 부동산 정책에 반하는 사업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알려준다.

성동구의 경우, 도시재생이 한창 진행 중인 성수동뿐만 아니라 마장동이나 송정동 땅값도 뛰고 있다. 마장동에서는 마장축산물시장이 도시재생 사업지로 선정되면서 집값이 크게 올랐다. 송정동은 사업지로 최종 선정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도시재생 시범사업을 한다고 알려지면서 값이 오르기 시작했다.

정원오 성동구청장은 “도시재생을 하면 그 지역 땅값은 무조건 오른다”면서 “성수동의 경우도 상생협약을 체결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상인들이 다 쫓겨났을 것”이라고 말했다. 상생협약은 적절한 임대료 수준을 유지하기로 약속하는 건물주와 임차인, 지자체간 자율협약이다.

정 구청장은 마장축산물시장을 서울시 도시재생 사업지로 추천하기 전 상생협약부터 추진했다.

“마장동 축산물시장 건물주들에게 상생협약 체결 비율이 50%를 넘지 않으면 도시재생사업을 추진하지 않겠다고 알렸다. 그랬더니 건물주들이 사인을 했다. 사업지로 선정되고 값이 오르기 시작하면 건물주들 사인을 받기 힘들어진다.”

정 구청장이 ‘선 젠트리 방지, 후 도시재생’을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도시재생을 시작하기 전 반드시 상생협약을 해야 한다. 상생협약이 된 곳에 도시재생사업의 우선권을 주는 게 옳다”면서 “그렇지 않으면 도시재생은 예산으로 건물주 좋은 일만 시키고 만다”고 말했다.

상생협약은 임대료 억제를 위한 법적 장치가 완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고안된 임시책에 가깝다. 도시재생시대를 맞아 전국적인 차원에서 젠트리가 우려되고 있는 만큼 상가임대차보호법을 개정하고 ‘지역상생발전법’(가칭)을 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상가임대차보호법을 개정하면 임대료 상한을 규제할 수 있고, 상가임대차계약 보호 대상을 확대할 수 있다. 또 ‘젠트리 방지법’이라고 불리는 지역상생발전법을 만들면 젠트리가 생겼을 때 지자체에서 다양한 대책을 쓸 수 있게 된다. 입점 제한 등이 대표적이다.

글=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 사진=최현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