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지형은] 평화의 상상력

입력 2017-09-07 17:39

한참 옛날이다. 강한 나라들이 세상을 장악하고 있었다. 더 강한 군사력과 무기체계를 갖춘 나라가 나타나서 강한 나라들을 꺾고 권력을 틀어쥐었다. 세상을 지배하는 원리는 힘 특히 군사력이었다. 강대국들 틈바구니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차이는 작은 나라들에 역사의 희망이라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 역사의 부조리한 질곡 가운데 어떤 작은 한 나라의 운명이 처량했다. 나라는 망했고 백성들은 먼 타국으로 끌려갔다. 많은 사람이 끌려간 나라의 발전된 문명과 경제의 풍요로움에 동화됐다. 민족의 정체성과 신앙의 올곧음은 현실적인 생존의 절박함 앞에서 사치스러운 관념일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 사람이 등장해서 미래의 희망을 외치기 시작한다. 체념과 절망의 계곡에서 그나마 그럭저럭 살기는 한다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소리를 높였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현재의 모든 상황을 역전시킬 것임을 선포한다. 물리적인 힘으로 다른 민족을 억누르는 방식이 아니라 창조의 공의와 더불어 행복해지는 상생이 가능하다고 설교한다. 평화, 평화의 상상력이었다. 듣는 사람들로서는 이 사람이 외치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이 어디에서 왔는지 도무지 모를 일이었다.

지금까지 말한 것은 주전 6세기 중반 고대 근동지방의 상황이다. 예루살렘이 초토화되고 이스라엘 민족은 바벨론으로 끌려갔다. 민족성과 신앙을 체념하는 대신 생존의 보장을 다행스러워하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무명의 예언자가 이사야서 40장 이후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예언자는 먼저 이스라엘 민족을 위로하며 하나님께서 찾아오신다고 외친다. “너희는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위로하여라! 너희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한 소리가 외친다. 광야에 주께서 오실 길을 닦아라. 사막에 우리의 하나님께서 오실 큰길을 곧게 내어라.”

창조와 구원의 하나님이 새로운 일을 하실 것이다. 고통의 과거는 잊고 희망의 미래가 열릴 것이다. “너희는 지나간 일을 기억하려고 하지 말며, 옛일을 생각하지 말아라. 내가 이제 새 일을 하려고 한다. 이 일이 이미 드러나고 있는데,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내가 광야에 길을 내겠으며, 사막에 강을 내겠다.” 예언자는 땅에서 길을 잃은 사람들에게 하늘로 이어지는 길을 보여준다. 사람들 눈에는 아직 보이지 않는 길을 희망의 상상력으로 바라본다. 참담한 현실과 이어지는 암담한 미래의 현상을 넘어서도록 거룩한 상상력을 일깨운다. 예언자의 말은 그저 망상이 아니었다. 예언자는 두 사람을 통하여 상상이 현실이 된다고 말한다.

한 사람은 당시의 역사 무대에서 누구나 알 수 있는 인물이고 다른 한 사람은 하나님의 종으로 불린 신비의 인물이었다. 구체적인 인물은 신흥 강국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였다. “고레스를 보시고는 너는 내가 세운 목자다. 나의 뜻을 모두 네가 이룰 것이다 하시며, 예루살렘을 보시고는 네가 재건될 것이다 하시며, 성전을 보시고는 너의 기초가 놓일 것이다 하신다. 고레스는 들어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부른 것은,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이스라엘을 도우려고 함이었다.”

어느 나라나 민족이든 어려운 시기를 겪는다. 오늘날 선진국 가운데 역사의 굴곡을 겪지 않은 나라가 없고, 도전을 이겨내지 않은 나라가 없다. 어려운 시기를 이겨내려면 현상 너머를 바라보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북핵 문제로 꽉 막힌 한반도 및 동북아의 상황을 누가 풀 것인가. 희망과 평화의 상상력을 담은 메시지를 누가 외칠 것인가. 고레스가 오늘날에는 누구인가. 시진핑이든 블라디미르 푸틴이든 오늘날의 고레스가 있을 테다. 평화의 상상력을 가진 사람도 마찬가지다. 한반도 상황의 중재에 나서겠다는 스위스 대통령 도리스 로이타르트든 어떤 상황이든 전쟁은 안 된다는 독일 총리 앙겔라 메르켈이든 말이다. 가장 중요한 일은, 당사자인 우리가 먼저 평화의 상상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지형은 성락성결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