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년 6월 평양에서 사역하던 마포삼열(Samuel A Moffett·1864∼1939) 선교사는 안식년을 맞아 아내 앨리스 피시 마페트와 귀국길에 오른다. 1000명 넘는 평양의 기독교인이 이들을 배웅하기 위해 십 리를 걸어 역까지 나왔다. 마포삼열 선교사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 브라운 총무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 순간을 이렇게 기록했다.
“저는 겨우 16년 만에 평양시에 그토록 뚜렷한 변화가 왔다는 것을 깨닫기가 힘들었습니다. 16년 전 이달 그곳에 처음 들어갔을 때 그 도시에는 한 명의 기독교인도 없었습니다. … 남성, 여성, 남학생, 여학생이 모두 줄지어 서서 송별 찬송가를 부르는 것을 볼 때 우리의 가슴은 벅찼습니다. … 우리는 주님께서 한국에서 섬기는 특권을 우리에게 주신 데 대해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537쪽)
미 북장로교 선교부에서 파송한 마포삼열 선교사는 1890년 1월 자신의 26번째 생일에 한국 땅을 처음 밟았다. 1936년 일본과 신사참배 문제로 갈등을 겪다 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46년간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렸다. 평양을 중심으로 교회 1000여개와 학교 300여개를 세웠다. 무엇보다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세워 주기철, 이기풍 목사 등 800여명을 배출하며 한국 개신교 신학교육의 토대를 다진 인물이다.
그는 일기 등 다른 기록 대신 편지를 남겼다. 이 책은 1904년부터 1906년까지 그가 주고받은 편지와 각종 보고서 등을 담았다. 이 시기는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면서,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지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때다. 그가 평양에 머물며 교회를 지키고 종군 기자들과 교류하며 주고받은 편지들, 1905년 기다렸던 첫아들 제임스 매키의 출생 이후 가족들과 나눈 편지 등을 볼 수 있다.
무엇보다 평양 기독교의 부흥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 초창기 서북지역 교회사라 부를 만하다. 마포삼열 선교사는 1904년 평양 선교지부 연례 보고서에서 평양 부흥의 원동력이었던 사경회에 대해 보고했다. 당시 사경회는 새벽기도와 찬양, 오전 경건회와 성경공부, 오후 성경공부와 찬양, 불신자 전도 이후 저녁 전도집회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주제별, 성경책별, 한 절씩 주석적으로 공부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썼는데 한국인들은 한 절씩 주석을 참고해 공부하기를 선호했다. 마포삼열 선교사는 “작년 한 해 동안 약 60퍼센트의 등록교인과 학습교인이 한 번 이상 사경회에 참석하는 특권을 누렸으며, 약 75퍼센트의 미조직교회가 사경회를 개최했다”며 “사경회가 인기 있는 진정한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에 있다”고 적었다.
이 책은 한국 기독교의 과거를 통해 오늘날 한국교회가 이런 형태를 띠게 된 근원을 보여준다. 또 당시 한국어 필기 및 구술시험을 치르고 점수까지 본부에 보고했던 미국 선교사들의 모습을 통해 지금 한국교회의 선교 행태까지 점검해보게 한다.
이렇듯 소중한 자료가 세상의 빛을 보기까지 여러 사람의 숨은 헌신이 있었다. 생전에 시아버지를 만난 적 없었던 며느리 아일린 마페트 여사는 짐 꾸러미에서 발견한 편지들을 20여년간 마이크로필름 판독기로 읽어가며 컴퓨터에 손수 입력했다. 미국 UCLA 인문대 한국기독교학 석좌교수인 옥성득 교수가 10년간 이를 번역하고 역주를 달며, 추가 자료까지 발굴해 완성했다.
그럼에도 실제 출간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당초 10권으로 기획됐던 ‘마포삼열 서한집’은 2011년 1권을 끝으로 작업이 중단됐다. 숭실대 가치와윤리연구소가 이를 다시 기획하고, 강북제일교회의 후원과 독자들의 선주문에 힘입어 올 초 새물결플러스에서 개정판 1권과 2권을 냈다. 출판사가 손해를 무릅쓰고 3권에 이어 이번 책까지 발간했지만, 재정 문제에 부닥쳐 후속 출간이 불투명한 상태다. 옥 교수는 블로그에 “선교사 자료집은 한국교회의 자산”이라며 “한국교회와 한국 교인들이 백 년을 지탱해 줄 자산을 늘리는 일에 동참해 주기를 기대한다”고 적었다.
김나래 기자 narae@kmib.co.kr
마포삼열의 편지에 담긴 평양 부흥의 생생한 모습
입력 2017-09-07 0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