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김남중] 핫플레이스의 그늘, 젠트리

입력 2017-08-31 17:28

동네가 뜨면 임대료가 뛰기 시작한다. 장사하던 상인들은 뛰는 임대료를 감당할 수 없어 밀려나고 그 자리를 대자본이나 프랜차이즈가 차지한다. 서울의 ‘핫플레이스’들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이런 현상을 설명하는 용어가 ‘젠트리피케이션’이다.

핫플레이스는 ‘젠트리’를 그림자처럼 드리운다. 젠트리가 습격하지 않을까? 장사가 좀 된다 싶으면 이런 걱정부터 하는 게 상인들의 현실이라고 한다. 1년 뒤, 2년 뒤를 가늠하기 힘들다. 임차상인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시한부 인생’이라고 말한다.

서울에서 핫플레이스는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홍대앞, 서촌, 경리단길, 가로수길 등이 전통적인 핫플레이스라면 요즘엔 성수동, 연남동, 망원동, 해방촌, 익선동, 중림동, 봉천동, 신림동도 핫플레이스 대열에 가세했다. 지방도 마찬가지다. 제주도야 말할 것도 없고, 부산 해운대와 남포동 일대, 경주 ‘황리단길’, 대구 김광석길, 전주 서학예술촌, 양양 죽도해수욕장까지 젠트리가 번지고 있다. 문재인정부가 예고한 전국적 규모의 도시재생 뉴딜사업이 시작되면 젠트리는 전 사회적인 문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젠트리는 그동안 내몰리는 상인들이라는 측면에서 주로 조명돼 왔다. 그러나 젠트리는 상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선 가난한 주민들이 내몰리는 일이 벌어진다. 동네가 유명해지면 전·월세도 상승한다. 가난한 세입자들은 떠날 수밖에 없다. 또 쪽방촌이 사라지고, 봉제공장이나 인쇄소, 철공소 등 도심 가내수공업자들이 밀려난다. 외국인노동자 거주지나 노인들 집결지, 성소수자 공간 등도 젠트리 물결에 휩쓸려 무너지고 만다.

젠트리는 건물이나 가게들이 화려하게 바뀌는 ‘부티크화’를 특징으로 한다. 그 이면에서는 주민들의 생활에 필요한 가게들, 예컨대 세탁소나 철물점, 분식집, 사진관, 심지어 어린이집까지 사라지는 일이 벌어진다. 서민들이 이용하던 허름한 가게들은 카페, 레스토랑, 공방, 갤러리 등으로 빠르게 교체된다. 주민들의 생활공동체가 무너지고, 주민을 위한 동네가 아니라 관광객을 위한 동네가 돼버린다.

젠트리를 얘기할 때 건물주의 탐욕이 비판의 초점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젠트리는 구조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부동산 투자 대상이 아파트에서 다가구주택으로 바뀌고 있다는 점, 은퇴에 직면한 베이비부머들이 노후대책으로 임대료 수입을 추구한다는 점, 저금리가 지속되면서 임대수입을 노리는 투기적 수요가 커지고 있다는 점 등이 젠트리의 연료가 되고 있다. 합정동의 한 부동산중개업자는 “아파트는 이제 재미가 없다고 한다. 요즘은 건물 투자가 대세다”라며 “서울시내 웬만한 동네라면 15억∼20억원 건물은 매물이 나오는 즉시 팔려나간다”고 전했다.

젠트리가 일자리와 경기, 노동소득 등에 미치는 영향도 눈여겨봐야 할 부분이다. 임대료가 뛰면 자영업자들은 우선 일하던 직원들을 내보내고 가족노동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버티게 된다. 젠트리가 일자리도 없앤다.

임차상인들의 단체인 ‘맘상모’(맘편히장사하고픈상인모임)는 최저임금 인상에 반대하지 않는다. 최저임금이 오르면 서민들의 주머니 사정이 좋아지고 가게를 찾는 손님들이 늘어날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에선 최저임금 인상의 여력을 임대료가 빼앗아 간다. 서민들의 노동소득으로 배분돼야 할 돈이 고소득층의 임대수입으로 이전되는 것이다.

젠트리가 무섭다고 해서 낙후된 동네를 개선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동네를 살려낸 결과가 건물주의 임대료 수익으로만 귀결되는 걸 보고 있을 수만은 없다. 공동체가 함께 일궈낸 가치를 건물주가 독식해도 되는 것인지, 개인의 재산권이란 이유로 동네의 공동체성과 다양성이 훼손돼도 되는 것인지, 일자리를 늘리고 임금소득을 올리기 위해 임대료를 규제할 필요가 있는 건 아닌지, 새로운 질문들을 던져야 한다.

김남중 사회2부 차장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