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와 선교는 복음을 전파하고 확산하는 일이다. 따라서 복음을 정확히 이해하고 내면화한 사람이라야 그 일에 참여할 수 있다. 복음의 의미가 오해되고 왜곡된 상태의 포교행위는 하나님나라에 득보다 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개종자 한 사람을 만들려고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하나가 생기면 그를 너희보다 배나 더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마 23:15, 새번역)
과연 오늘의 교회는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나 율법사들보다 복음을 깊이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만일 아니라면 전도나 선교의 명분으로 모든 방법을 정당화하는 행동을 멈추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신을 성찰하고 개혁해야 할 것이다.
증거행위보다 증인의 자질이 중요하듯 전도행위나 선교행위보다 복음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 끌어안는 지속적 여정이 강조돼야 한다. 섬김(행위)을 선택한 마르다보다 주님과 깊은 사랑의 관계를 선택한 마리아가 옳다고 하신 이치를 진지하게 되새길 필요가 있다.
사도 바울이 선교행위를 열심히 감당했다는 행동주의적 결론을 내리기보다, 바울 서신 곳곳에 엿보이는 주님과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주목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권’(고후 5:14)이 선교적 헌신의 원동력이었음을 깨달아야 한다. 존재와 행위를 이분법적으로 접근하기보다 존재(증인)로부터 행위(증거)가 흘러나온다는 유기적 이해가 필요하다.
복음을 ‘종교적 행운’ 정도로 오해해 산지사방에 싸구려로 퍼뜨리거나 ‘종교적 세력 확장’을 교회의 과업으로 착각해 온갖 수단을 동원해 타 종교인을 ‘우리 편’으로 끌어오려는 시도는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의 포교와 유사한 오류다. 복음은 ‘천당’ 가는 복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결정체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반영하는 방식으로 복음이 구현되고 전파돼야 한다.
최근 지하철에서 무례한 전도자들이 언어폭력을 불사하며 불교 승려들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일이 거듭 발생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전도를 내세운 그 ‘민폐’ 현장에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있었는가.
천재지변으로 고통받는 지구촌 곳곳의 이웃들을 사랑으로 보듬고 위로하기보다 그들이 우상숭배와 죄 때문에 하나님의 징벌을 받는다는 편견이 어느덧 교계의 관행이 된 듯싶다. 무엇이든 하나님이 뜻하시면 섭리적으로 사용하지만, 모든 경우를 기계적 인과론으로 밀어붙이는 건 성경적 근거가 희박하다.
자연현상은 “선인과 악인에게 두루 햇빛과 비를 비추시고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두루 비를 내리시는”(마 5:45) 하나님의 일반은총 영역이다. 구약성경 욥기는 매사를 인과응보의 관점으로 곡해하여 욥의 잘못을 들추려던 친구들의 논리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세상보다 교회의 우상숭배가 진짜 문제다. 예수님이 책망하신 대상은 이방인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를 비트는 종교 지도자들이었다. 무슬림이든 힌두교도든 불교도든 무신론자든 그들은 우리가 쳐부숴야 할 대적이 아니라 복음으로 품어야 할 사랑의 대상이다. 이방 신전에 침투해 허깨비 우상을 때려 부술 게 아니라 우리 안의 우상들을 제거해야 한다. 하나님을 모르는 그들의 눈에서 티끌을 빼려 하지 말고, 빛의 사명과 소금의 역할을 저버린 우리 눈의 들보를 먼저 빼내야 한다.
하나님의 공의는 사랑과 대치되는 개념이 아니라 사랑의 이면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고전 13:6). 따라서 ‘팔이 안으로 굽는’ 자정능력 없는 한국식 정(情)과 다르다. 신학자 미로슬라프 볼프(Miroslav Volf)의 주장처럼, 죄에 대해 진노하지 않는 신은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라 불의와 기만과 폭력의 공범일 뿐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완벽하게 구현된 현장이다. 인간의 분노는 문제를 일으키지만 하나님의 의로운 진노는 세상을 구원하신다.
사랑과 공의의 복음을 누리고 전하는 우리는 사랑 안에서 참된 말을 해야 한다(엡 4:15). 공의를 빙자한 사랑 결핍도, 사랑을 빙자한 공의 부재(不在)도 복음일 수 없다.
체코 수도 프라하의 중앙광장에 개혁자 얀 후스(Jan Hus)의 동상이 서 있다. 600년 전 그가 개혁운동을 펼치면서 외쳤던 좌우명이 기록돼 있다. “서로 사랑하라. 그리고 서로에게 진리를 요구하라.”
정민영 (성경번역선교회 선교사)
[시온의 소리] 사랑과 공의의 복음
입력 2017-09-01 0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