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위한 100억… 법적 성격은?

입력 2017-08-31 05:00



정부가 지난 29일 발표한 내년 예산안에는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을 위한 특별구제 계정에 100억원을 신규로 출연하는 안이 담겼다. 그간 발 빼기에 급급했던 정부가 책임을 어느 정도 인정한 것으로 평가된다. 다만 정부 출연금의 법적 성격을 둘러싼 미묘한 쟁점이 남아 국회 논의가 필요할 전망이다.

가습기 살균제 특별구제 계정은 실질적으로 배상을 받을 수 없는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를 지원하기 위해 설치됐다. 살균제 제조업체와 원료업체 등이 총 1250억원의 재원을 분담토록 돼 있다. 정부가 예산안에 포함시킨 100억원은 이 계정에 투입된다. 정부는 단계적으로 총 225억원을 출연한다는 계획을 세워두고 있다.

전체 예산안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낮지만 100억원이 갖는 의미는 크다. 살균제 논란 과정에서 정부는 그동안 책임이 없다고 선을 그어왔다. 피해자 지원 역시 정부가 우선 필요한 지원을 한 뒤 해당 제조·원료 업체로부터 지원액을 회수하는 구상금을 전제로 이뤄졌다. 법적 책임은 없으니 ‘배상’도 없다는 논리였다.

이런 정부의 입장은 문재인 대통령이 피해자들을 직접 만나 공식 사과하면서 달라졌다. 문 대통령은 지난 8일 “정부를 대표해 가슴 깊이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며 “정부도 무거운 책임감을 갖고 할 수 있는 지원을 충실히 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따라서 100억원은 문 대통령이 약속한 정부 지원의 일환으로 풀이된다. 정부가 사태 발생 후 처음으로 예산을 들여 피해자를 직접 구제키로 한 것이다.

정부의 입장이 바뀌면서 출연금 성격을 둘러싼 논의도 본격적으로 점화될 것으로 보인다. 출연금이 법적 책임이 수반되는 배상인지, 도의적 책임만을 인정하는 피해자 지원 차원인지가 쟁점이 될 전망이다.

일단 정부는 출연금이 배상금은 아니라는 입장이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30일 “청와대가 이미 밝혔듯 정부가 사태에 도의적 책임을 지는 차원에서 예산을 배정하게 된 것”이라며 “출연금의 구체적 성격과 용처 등은 국회가 법 개정을 통해 결정해야 할 사안”이라고 설명했다. 앞서 피해자들이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정부의 법적 책임이 인정된 적이 없기 때문에 정부의 책임은 도의적 차원으로 한정된다는 것이다.

야당은 정부가 특별구제 계정에 출연금을 배정한 것 자체에는 특별히 반대하지 않는 분위기다. 다만 향후 예산안 논의 과정에서 출연금의 성격을 명확히 할 필요는 있다고 지적했다. 자유한국당 임이자 의원은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정부에 도의적 책임이 있기 때문에 그 책임을 지는 차원에서 예산을 투입할 수는 있다고 본다”며 “출연금의 성격은 국회 상임위에서 구체적으로 논의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 출연금을 구제 사각지대에 놓인 피해자들에게만 쓸 수 있도록 특별구제 계정 관련법을 개정하는 방안도 검토된다. 바른정당 하태경 의원은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중 세퓨사 제품을 사용한 피해자들은 세퓨사가 파산하면서 배상받을 길이 없어진 상태”라며 “명백히 피해를 보고도 구제받을 길이 사라진 이들을 위해 정부 예산이 쓰이도록 법을 개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세종=정현수 기자 jukebox@kmib.co.kr, 그래픽=이은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