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파기환송심서 선거법 유죄 인정된 원세훈 전 국정원장

입력 2017-08-30 17:39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가 파기환송심에서 유죄로 인정됐다. 이번 판단에는 최근 국정원 적폐청산 태스크포스(TF) 조사 결과 드러난 사실들이 중요하게 작용했기에 원 전 원장이 재상고하더라도 대법원이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국가 최고 정보기관이 단순히 정치에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선거에 개입했다는 점이 법원에서 사실상 확정됐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재판부는 판결문에 “국정원 심리전단 사이버팀이 매일 이슈와 논지를 받았고, 팀별로 영역을 나눠 분업적으로 활동하는 등 집단적·조직적으로 활동했다”라고 적었다. 원 전 원장에게는 “사이버팀 업무를 지휘계통을 통해 수시로 보고받았고, 조직적으로 범행을 반복했다”라고 꾸짖었다. 국정원이 특정 정치세력을 위해 선거에 조직적으로 개입한 점을 명확히 한 것이다. 그러면서 “국민은 국정원이 특정 정당이나 정치세력이 아닌 국민을 위한 봉사자로 업무에 매진하기를 바란다. 국정원이 거듭나 국론을 분열시키고 편을 가르는 것이 아닌 국가안보의 주춧돌이 돼야 한다”라고 당부했다. 맞는 말이다. 국정원을 권력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기관으로 만든 범죄를 저지르고도 법정에서는 국가안보를 위해서였다는 논리로 처벌을 피하려 했던 원 전 원장은 국민에게 진심으로 사죄해야 한다.

원 전 원장의 선거법 위반 혐의가 유죄로 판단됐지만 그동안 국정원의 불법적인 정치공작의 실태가 모두 밝혀진 것은 아니다. 4년 넘게 진행된 원 전 원장 재판은 국정원이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댓글부대를 운영했다는 여론조작 사건을 판단한 것에 불과하다. 국정원 적폐청산 TF는 민간인 외곽팀에 매년 30억원씩 예산이 투입된 사실과 이들의 명단까지 확보했다. 야당 유력 정치인들의 동향을 파악해 청와대에 보고하거나 극우단체가 각종 시위를 벌이도록 지원한 정황도 밝혀냈다. 일부 사안은 검찰에 넘겨 수사가 시작됐지만 대부분은 아직 조사 중이다. 과거를 청산하는 작업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본업은 뒤로한 채 정치에 개입하고, 선거에까지 영향을 미친 국정원의 구태는 여기서 끝나야 한다. 과거 어느 정권도 정치적으로 국정원을 이용했다는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늘 국정원의 정치적 독립을 약속했지만 아직도 요원하다. 잘못을 적당히 덮거나 과거청산 작업을 정치적으로 이용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무엇보다 사실관계를 철저하게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잘못된 과거를 파헤치는 과정에서 불필요한 갈등이 재연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정치색을 최대한 배제하며 신중하게 진행해야 한다. 한 건 하겠다는 식이어서는 정치보복이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조용하되 단호한 진실규명과 강력한 책임자 처벌만이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