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 그 기분 그대로… ‘공항데이트’ 뜬다

입력 2017-08-29 05:00

대학원 입학을 준비 중인 박모(30)씨는 이달 초 여자친구와 함께 인천국제공항을 찾았다. 점심은 비행기가 이륙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공항 4층 한정식집에서 해결했다. 공항 내 영화관에서 ‘택시운전사’도 봤다. 저녁이 다 돼서 박씨는 출국장이 아닌 공항철도 승강장으로 향했다. 그에게 공항은 데이트 장소였다.

40, 50대에게 비행기를 타는 곳에 불과한 공항이 20, 30대에게는 ‘이색 데이트’ 장소로 각광받고 있다. 공항은 식당 카페 편의점 영화관 서점 등 다양한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중교통을 이용한 접근성도 좋아 데이트 장소로 손색이 없다. 무더운 여름철에도 실내온도를 항시 23도로 유지하는 덕에 시원하기까지 하다. 운이 좋으면 드라마·화보 촬영을 하거나 출국하는 연예인을 볼 수 있는 것도 공항 데이트의 묘미 중 하나다.

대학생 김모(25·여)씨도 지난 5월 남자친구와 함께 인천국제공항에서 데이트를 즐겼다. 베트남 쌀국수를 먹고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승객용 대기 의자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무작정 구경했다. 기분도 낼 겸 남자친구와 사진도 여러 장 찍었다. 김씨는 “공항에는 여행가는 사람이 많아 들뜨게 된다”며 “알게 모르게 느껴지는 설렘 때문에 공항을 찾아 논다”고 말했다.

공항 데이트를 즐기는 20, 30대의 수를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유행에 민감한 기업들은 이들을 겨냥한 마케팅을 내놓느라 분주하다. 멀티플렉스 영화관 CGV는 공항 데이트족(族)을 위한 마케팅을 준비하고 있다. CGV 관계자는 “공항에서 데이트를 하는 20, 30대가 적지 않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다”며 “현재 관련 마케팅을 준비 중”이라고 말했다.

이색 데이트 장소로 공항이 뜨는 가장 큰 이유는 비교적 적은 돈으로도 여행 욕구를 채울 수 있다는 점이다. 20, 30대의 여행욕구는 높다. 지난달 시장조사전문기업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는 만 19∼59세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여름휴가’ 관련 설문 조사를 했다. 20대의 94.4%, 30대의 89.2%가 1박 이상 여행을 계획 중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하지 않다. 시간과 돈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계획을 세워도 두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면 여행을 가기 어렵다. 박씨는 “시험 준비와 주머니 사정 때문에 해외여행을 가기는 어렵다”며 “공항에 가면 여행욕구가 간접적으로라도 채워지는 것 같아 좋다”고 말했다.

대리만족을 느끼기 위해 찾은 공항이 때로는 상대적 박탈감을 주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김씨는 “여행은 가고 싶은데 못 가니까 여행객을 보며 대리만족을 하기 위해 공항을 찾지만 부러운 마음이 들 때는 허무하다”고 토로했다.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의 지난달 설문조사에선 73.5%가 SNS에 타인이 올린 해외여행 관련 글과 사진에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고 응답했다.

공항 데이트를 즐기는 20, 30대는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공항이 젊은이들의 심리적 탈출구 역할을 하고 있어서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28일 “공항이 일상에서 벗어나는 ‘탈출구’ 역할을 하고 있다”며 “20, 30대는 공항에 가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기 때문에 어느 정도 박탈감을 느껴도 공항을 찾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배규한 국민대 사회학과 교수는 “시간적·경제적으로 해외여행을 가기 어려워 공항에서 데이트만 하는 현실이 안쓰럽다”면서도 “하지만 공항을 하나의 ‘좋은’ 시설로 인식해 이용한다는 것은 젊은이다운 발상의 전환”이라고 말했다.

손재호 기자 sayho@kmib.co.kr, 그래픽=전진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