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공연의 관객은 당신뿐… 오시겠습니까?

입력 2017-08-29 05:00 수정 2017-08-29 17:56
서울 남산예술센터 객석 오른쪽 끝부분에 한 소녀(배우)가 흰 옷을 입은 채로 앉아있다. 남산예술센터 제공
연극 ‘천사-유보된 제목’의 서현석 연출가. 권준협 기자
휠체어에 앉은 관객이 하얗게 덮인 무대 뒤 분장실에서 소녀를 바라보고 있다. 남산예술센터 제공
작은 창문 너머로 흰 극장이 덩그러니 놓여있다. 한동안 극장을 바라봤다. 오른발 왼발, 한걸음씩 옮겼다. 극장에 다다랐다. 극장 문을 여니 좌석 B9-1에만 조명이 비춰졌다. 무대는 텅 비었다. 관객은 나뿐이었다. 조명이 어두워졌다. 다시 환해졌다. 멀리 떨어진 객석에는 한 소녀가 흰옷을 입고 앉아있었다. 소녀는 한 발씩 다가왔다. 들리는 건 발소리밖에 없었다. 소리는 점점 커졌다. 손전등을 들고 있던 소녀는 나를 무대 뒤의 공간으로 인도했다.

서울문화재단 남산예술센터는 29일부터 다음 달 3일까지 매회 단 한 명의 관객이 입장하는 공연 ‘천사-유보된 제목’을 올린다. 관객은 60분간 배우가 비추는 손전등의 빛을 따라 무대 뒤를 돌아다닌다. 이런 식으로 하루 40명씩 6일간 240명만 공연을 관람한다. 몇 분 간격을 두고 다음 관객이 투입된다. 이 공연은 무대와 객석의 경계, 배우와 관객의 경계를 무너뜨려서 관객이 참여해 공연을 만드는 ‘이머시브(Immersive) 연극’의 한 갈래다.

지난 27일 기자가 이 공연을 미리 체험해본 후 서현석 연출가를 만났다. 그는 한 관객을 위한 공연을 연출한 계기와 작품 의도를 설명했다. “자신만의 느낌에 충실한 연극을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고 내면 깊숙이 생겨나는 날 것의 느낌에 집중할 수 있도록요. 하루는 연극을 보러 갔다가 관객이 저 혼자였던 적이 있어요. 꽤 큰 극장이었는데 관객이 없었어요. 그때 연극적 체험을 했어요. 여러 관객이 공연을 보는 경우에는 주변에서 박수치면 따라 치게 되고 울면 분위기에 동화되고 영향을 많이 받잖아요. 혼자일 때는 굉장히 달라지더라고요.”

오롯이 혼자 느끼는 내면의 감정은 때론 은밀하다. 공연은 배우들의 움직임이나 무대효과가 아니어도 내면을 생각할 단초를 던져준다. “식상한 것과 은밀한 것 사이의 충돌을 느끼게 하고 싶었어요. 둘 사이 일어나는 상호작용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어린 시절 기억나는 친구의 이름은?’ 회원가입 때 수없이 보는 질문이잖아요. 질문은 흔한 것인데 정말로 어린 시절 기억이 솟아날 수도 있잖아요. 또 이를 테면 천사, 날개, 흰옷을 입은 소녀는 진부한 소재라고 생각하잖아요. 하지만 각자 자신만의 경험과 기억이 있죠. 공적인 공간에서 사적인 경험을 만들고 싶었어요.”

독일 출신의 철학자로 나치에게 쫓기다가 망명 도중 자살한 발터 벤야민의 문학적 상상력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 막상 공연을 체험하다 보면 배우의 대사가 없고 분명한 메시지가 등장하지 않아 연출의 의도를 분명히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하지만 애초에 분명한 메시지를 주지 않겠다는 것이 연출 의도다. 그는 관객들에게 공간에서 오는 총체적 느낌을 전달하길 원했다. 소통의 부재조차도 일종의 교감일 수 있다는 것이다.

관객들은 입장 전 MP3와 VR고글을 받고 극장 안팎의 공간을 돌아다닌다. 연극이 아니라 전시 또는 영화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장르가 중요하지 않았다고 단언했다. 다만 ‘연극이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연극의 장점은 여럿이 모여서 집단적 경험을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민낯을 보면서 개인적인 감정을 끄집어내는 것이기도 하다. 어쩌면 그 근원에는 고독이 있을지 모른다. 서울 중구 남산예술센터. 3만원.

권준협 기자 ga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