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덤이 변하고 있다. H.O.T. 젝스키스가 주도한 1997년과 대형신인 보이그룹 워너원이 등장한 2017년. 팬덤은 그동안 얼마만큼 달라졌나. 1세대 팬덤은 공식 팬클럽을 중심으로 전국적인 위계가 분명했다. 하지만 요즘 팬덤은 비공식 팬클럽이 득세하면서 활동 모습이 다양해졌다. 1997년의 팬덤이 10대 중심이었다면 2017년의 팬덤은 20∼30대가 전면에 나서 지하철 생일축하 광고 같은 ‘물량 공세’를 더 활발히 펼치고 있다.
20년 전과 비교하면 팬덤 문화가 더욱 과열된 면도 있다. 워너원이나 걸그룹 아이오아이와 같이 처음부터 정해진 기간만 활동하는 이른바 ‘시한부 아이돌’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팬 활동의 밀도가 한층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들 팬의 집중된 화력이 기존 대형 소속사 아이돌의 자리를 위협하면서 팬덤 간의 경쟁이 과열된 것이다. 이런 여러 변화를 관통하는 최근 팬덤 문화의 가장 큰 특징은 전문성과 비판성으로 요약된다.
전문가 수준, ‘홈마’의 등장
비공식 팬 페이지를 관리하는 ‘홈마(홈페이지 마스터)’가 등장하면서 팬덤은 본격적으로 전문화됐다. 이들은 사양 좋은 일명 ‘대포 카메라’로 아이돌 사진과 영상을 직접 찍어 인스타그램이나 트위터 등에 실시간으로 올린다. 사진을 ‘굿즈’(기념품)나 ‘슬로건’(응원도구)으로 만들어 판매하기도 한다. 워너원의 홈마인 한 트위터 이용자는 “가수 홍보를 위해서 혹은 팬 활동을 활발히 하면서 생기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서 상품을 제작한다”고 설명했다.
언론 대응을 하거나 법적 조치를 취하고 외국어 홍보자료를 만들기도 한다. Mnet ‘프로듀스 101 시즌2’의 1위 강다니엘과 2위 박지훈의 일부 팬들은 데뷔곡 ‘에너제틱’ 무대에서 응원하는 가수의 분량이 적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팬들은 최근 다음 아고라에 방송사와 소속사를 상대로 “강다니엘 분량에 임팩트 있는 안무를 넣고 곡의 안무 동선을 변경해 달라”고 청원했다. 일부는 뮤직비디오 멤버별 분량을 분석하고 항의 자료를 배포하기도 했다.
아이돌 팬들은 20년 동안 각종 갈등 사태를 겪으면서 집단적인 경험을 쌓았다. 예컨대 보이그룹 엑소 팬의 경험은 워너원 팬의 경험이기도 한 것이다. 아이돌 전문 웹진 ‘아이돌로지’의 미묘(본명 문용민) 편집장은 “산전수전을 다 겪은 사람이 다재다능해지는 것과 비슷하다”며 “아이돌 팬덤의 역사가 20년이 된 만큼 사과문 작성 요령이나 소송을 위해 자료를 수집하는 방법 등 노하우가 팬덤 전반에 집단적으로 공유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숭배는 그만, 비판하는 팬덤의 탄생
#1. 걸그룹 마마무의 일부 팬들은 지난 3월 콘서트에서 공개된 영상이 흑인 비하로 보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소속사는 영상을 재편집하겠다고 약속했다. #2. 보이그룹 빅스의 팬들은 1월 소속 래퍼 라비가 부른 곡 ‘BOMB’ 뮤직비디오 일부가 여성 혐오와 성 상품화로 비춰질 수 있다고 꼬집었다. 라비와 소속사는 사과문을 올리고 해당 장면을 즉각 삭제했다. #3. 보이그룹 방탄소년단의 팬 일부도 지난해와 올 초 가사의 문제점을 비판했다.
최근 팬덤에 비판하는 문화가 생기면서 팬들 사이에 마찰이 빚어지기도 한다. 이들은 ‘까빠(까면서 빠는 팬)’라고 불리며 공격받기도 한다. 하재근 대중문화평론가는 “요즘 아이돌 팬덤은 스타를 숭배하는 게 아니라 육성한다는 태도를 갖고 있기 때문에 스타에게 사회의식을 강조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런 팬과 안티 팬의 정체성은 정반대”라며 “무조건 욕하려는 팬과는 달리 애정을 기본적으로 지녔다는 것이 차이점”이라고 분석했다.
이런 팬들은 소속사와 같은 가수를 응원하는 팬을 비판 대상으로 삼기도 한다. 활동을 중간에 그만두는 ‘탈덕’이나 한 아이돌 이상을 좋아하는 ‘겸덕’은 보통 공격 대상이 되기 쉽다. 최근 보이그룹 아이콘의 공식 팬클럽은 소속사 YG가 “멤버들의 건강을 고려하지 않은 과도한 스케줄을 강행한다”는 등의 이유로 YG에서 제작하는 모든 굿즈의 보이콧을 진행한다고 선언했다. 이 역시 팬들이 가수를 키운다는 의식에서 일어난 현상으로 풀이된다.
글=권준협 기자 gaon@kmib.co.kr, 일러스트=공희정 기자
맹목적 열광서 비판적 지지로… 팬덤의 진화
입력 2017-08-28 0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