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馬) 계약 ‘뇌물의 순간’ 아무 말(言)도 하지 않았다… ‘이재용 유죄’ 결정적 장면들

입력 2017-08-28 05:00
2015년 8월 26일 코어스포츠와 삼성의 컨설팅 계약 체결 장면. 코어스포츠의 명의상 대표였던 박승관 독일 변호사(왼쪽)와 로베르토 쿠이퍼스 독일 헤센주 승마협회장이 삼성과의 컨설팅 계약서에 서명하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박상진 당시 삼성전자 사장(왼쪽)과 황성수 당시 삼성전자 전무가 역시 서명하고 있는 장면. 노승일씨 제공
서류는 코어스포츠가 2015년 9월 8일 삼성전자에 81만여 유로를 청구한 첫 인보이스(상업송장). 노승일씨 제공
“삼성은 지원을 하는 쪽인데, 뭐가 아쉬울 게 있어 서둘러 계약하자고 한 것입니까.” 지난 1월 3일 심야에 박영수 특별검사팀의 A검사는 노승일 전 K스포츠재단 부장을 불러 조사하다 문득 궁금해져 질문을 던졌다. 박원오 전 대한승마협회 전무가 최순실씨에게 “삼성이 2015년 8월 안에 계약을 완료하고자 한다” “빨리 회사를 설립해야 한다”고 말하는 걸 노씨가 들었다고 진술한 직후였다.

노씨에게 압수한 USB메모리 속 자료에는 최씨가 “가격이 높아서 나중에 말이 나온다”고 우려한 반면 삼성 측이 오히려 “마필 가격은 더 이상 하향할 필요가 없다”는 의견을 편 정황마저 담겨 있었다. ‘대체 삼성이 왜 그랬을까’는 국정농단 사태가 불거진 이후 수사기관뿐 아니라 국민적인 관심이었다. 법원이 25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정유라씨 승마 지원을 전직 대통령에 대한 뇌물공여로 판단한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일들이 있었다.

말(言) 없던 말(馬) 계약

독일 현지 회사 설립이 급했던 노씨는 인터넷 검색으로 한국인 운영 부동산 중개업체부터 알아봤다. 2015년 8월 14일 독일에 온 최씨는 노씨 소개로 둘러본 곳을 모두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결국 사무실도 없이 ‘마인제959’라는 서류상 회사를 인수하고 2015년 8월 25일 코어스포츠로 회사명만 변경했다. 정씨 등이 체류하던 예거호프 승마장 마구간 옆에 컴퓨터 3대, 프린터 2대를 둔 게 회사의 실상이었다. 1심 재판부는 코어스포츠를 최씨의 1인회사로 결론지었다.

삼성은 마구간 옆에 차린 코어스포츠와 2018년 12월 31일까지 승마장 임대, 장비 구입 등 거액의 운영비용을 지원한다는 컨설팅 계약을 맺었다. 이 계약을 위해 박상진 전 삼성전자 사장과 황성수 전 삼성전자 전무, 삼성의 법무팀 변호사 등 3명이 독일 프랑크푸르트 인터컨티넨탈호텔로 날아왔다. 맞은편에는 계약 사흘 뒤 사임하는 로베르토 쿠이퍼스 헤센주 승마협회장과 박승관 변호사가 앉았다. 최씨는 계약 현장에 나타나지 않고 고영태씨와 함께 호텔 1층에서 대기했다. 애초 호텔을 계약 장소로 택한 데 대해서도 “왜 남들 다 알게 호텔에서 하느냐”고 핀잔을 줬던 최씨였다.

삼성 측 참석자들은 계약서를 검토하는 30여분간 아무 말이 없었다. 서명할 때 노씨가 “사진을 한 장 찍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누구도 카메라를 바라보는 이가 없었다. 이날 노씨가 찍은 사진은 특검의 조서에 편철됐다. 재판을 거쳐 이 부회장이 최씨와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뇌물을 건네는 순간으로 남았다. 뇌물을 건넨 이들은 승마장으로 이동해 정씨가 말을 타는 장면을 잠시 보다 돌아갔다.

“인보이스를 보내셔야…”

계약 이후 삼성전자는 2015년 9월 14일 코어스포츠 명의의 하나은행 계좌에 10억8800만원을 입금했다. 박 변호사가 2015년 9월 8일 황 전무를 상대로 81만520유로를 청구한 인보이스(상업송장)에 즉각 응답한 것이다. 삼성이 앞서 “인보이스를 보내줘야 국제송금이 가능하다”고 가르쳐줘 노씨가 독일 비블리스 우체국에서 국제우편으로 보냈다. 승마선수가 2명이라고 계산한 허위 청구서였지만 돈은 그대로 들어왔다.

이후 수사과정에서 삼성전자가 똑같은 방식으로 2015년 12월 1일 8억9000여만원, 지난해 3월 24일 9억6000여만원, 지난해 7월 26일 7억5600만원 등 37억여원을 입금한 사실이 밝혀졌다. 특검은 삼성이 최씨의 개인적 지출까지 훈련지원금 명목으로 보전했다고 판단했다. 이 송금 내역은 재판을 거쳐 이 부회장의 국외재산도피죄로 인정됐다.

7개월여 전 특검 사무실에서 A검사는 “삼성이 승마자금을 지원해준 대가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아느냐”고 노씨에게 물었다. 노씨는 “당시에는 잘 몰랐는데, 지금 언론을 보니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등 삼성의 여러 문제를 해결해주는 대가로 지원한 게 아닌가 생각된다”고 답했다. 추측성 답변이었지만 1심 판결에선 사실로 인정됐다. 삼성 수뇌부가 이 부회장의 승계 작업에 애썼고 박 전 대통령에게 이를 묵시적으로 청탁하며 뇌물을 제공했다는 게 재판부의 결론이었다.

이경원 기자 neosar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