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명의 늙은이들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1930년대 중반 뉴딜정책의 근거가 될 법안들에 대해 잇따라 위헌 판결을 내렸다. 이에 격분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9명의 대법관을 향해 이렇게 일갈했다. 연방대법원은 국가의 역할을 확대한 뉴딜 법안들을 ‘볼셰비키 법안’으로 의심했다. 이런 법안들이 통과되면 미국이 소련처럼 될 것이라는 우려를 했다.
미국을 대공황에서 구출해낸 루스벨트 대통령도 가만있지 않았다. ‘아홉 명의 늙은이들’로만 채워진 대법원의 인적 구성을 바꾸겠다는 무모한 구상을 행동으로 옮겼다. 루스벨트는 대법관이 종신직인 점을 활용해 70세가 넘은 대법관이 스스로 은퇴하지 않을 경우 추가로 대법관을 임명해 9명의 대법관을 최대 15명까지 늘리는 내용의 대법원 개편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고령인 대법관들의 업무 과중을 막기 위한 고육지책이라고 강변했으나 “대통령이 이성을 잃었다”는 비판만 확산됐다. 결국 이 법안은 의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하지만 1930년대 말에 들어 대법원은 뉴딜에 대한 달라진 사회 분위기를 감안해 개혁 법안들을 합헌으로 판결하기 시작했다.
선거로 뽑힌 대통령·입법부와 사법부의 갈등은 미국이나 한국이나 예외가 없다. 미국 대통령도 대법원장은 코드 인사를 심으려 애썼다. 얼마나 공정한 척하느냐 하는 연기력의 차이만 있었을 뿐이다. 그러다가 뒤통수를 맞은 예도 수두룩하다. 공화당 소속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얼 워런을 대법원장으로 기용한 것이 일생일대의 실수”라고 한탄했다. 같은 보수 성향이라 믿고 뽑았는데, 워런 대법원장은 재임 기간 인종 문제, 경찰 등 공권력 제한 문제 등에 대해 백악관 의중과 다른 판결을 내렸다.
정치와 사법의 긴장은 권력자의 욕심 때문에 빚어진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가 고안될 때부터 잉태된 문제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3권 분립’의 대명제가 견제와 균형이기 때문에 입법·행정·사법부가 서로를 견제하는 것은 숙명이다.
미국에서는 세금·흑백 인종문제·총기 규제 등 중대한 문제를 9명에 불과한 대법관의 판단에 맡길 수 있느냐는 질문이 여전히 나온다.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은 선거를 통해 국민들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았지만 변호사 시험을 통과한 것 말고는 특별한 자격이 없는 판사들이 과연 나라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가 있느냐 하는 주장인 셈이다. 이에 대해 선거에서 당선된 것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중우정치(衆愚政治)의 폐단을 막을 수 있는 방파제는 사법 체제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정치가 무능하고 부도덕할 때 사법의 개입을 부른다. 지금 우리 사정이 딱 그렇다. 줄지어 선 ‘세기의 재판들’이 한국 정치를 또다시 뒤흔들 것이다. 25일에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1심 선고가 있고, 10월 중하순에는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법원의 판단이 내려질 것이다. 보수 정당들은 ‘사법 과잉’ ‘사법의 정치화’를 비판할 자격이 없어 보인다. 이를 초래한 당사자들이 보수 정치권이기 때문이다.
문재인정부에게도 조급함이 읽힌다. 국정 과제의 첫머리에 ‘국정농단 사건의 공소유지 철저’라는 문구를 굳이 넣어 정부가 재판에 영향을 미치려 한다는 비판을 자초했다. 김명수 대법원장 후보자 지명에 대해서도 사법부 장악 의도라는 말이 나온다.
정치의 본질은 갈등과 이익의 충돌을 타협과 합의로 풀어내는 것이다. 지금의 정치는 오히려 갈등을 촉발하고 악화시키는 사회적 짐이다. 세상사에서도 타협이 이뤄지지 않으면 법정으로 가는 수밖에 없다. 법원의 결정에 따라 정치권이 요동치는 것은 안정적인 사회의 모습은 아니다. 정치가 사법을 이용해서도 안 되고, 사법이 정치의 눈치를 봐서도 안 된다. ‘세기의 재판들’을 끝으로 정치가 더 이상 사법에 책임을 떠넘기지 말고 갈등을 해결하는 기능을 해주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하윤해 정치부 차장 justice@kmib.co.kr
[세상만사-하윤해] 정치가 사법에 책임을 넘길 때
입력 2017-08-24 17: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