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미당의 세례

입력 2017-08-25 00:00

촛불혁명 이후 ‘친일, 독재, 기득권’이라는 한 지붕 세 가족 적폐를 청산하자는 사회적 요청에 맞물려 ‘미당문학상’ 논쟁이 뜨겁다. 지난해 송경동 시인이 수상 후보 거부의사를 밝히며 불씨를 댕기더니 최근 미당전집이 발간되면서 불이 붙은 모양새다. 간행위원인 모 교수는 ‘우리나라 최고의 문화유산’ ‘한국 문학사의 여러 시인을 밤하늘의 별이라 한다면 무수히 많은 별이 한데 모인 성운이라 할 만하다’고 미당을 극찬했다. 친일과 독재에 굴종한 인간적 약점은 있을망정 예술적 업적은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과연 미당이 한국문학사에 끼친 영향력이 크다!) 그러나 내게는 ‘정치는 짧고 예술은 길다’는 그의 역설(力說)이 ‘조삼모사(朝三暮四)’식 도치(倒置)의 말장난으로만 생각된다. 가령 ‘그 목사 설교는 잘했지만 인간은 비루했지’와 ‘그 목사 인간은 비루했지만 설교는 잘했지’의 진정한 차이는 뭘까.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으련다.’ 미당을 민중시인으로 격상시킨 ‘애비는 종이었다’로 시작되는 ‘자화상’의 절정부다. 그러나 곧바로 남에게는 ‘교복과 교모를 이냥 벗어 버리고/ 모든 낡은 보람 이냥 벗어 버리고/ 주어진 총칼을 손에 잡으라!/ 적의 과녁 위에 육탄을 던져라!’(‘헌시’) 하고, 자신은 악마적 관능, 동양의 미, 신라의 미소 같은 미문(美文)의 향락을 탐닉했으니, 세계 어느 민중시인에게 이런 경우가 있었나 나는 알지 못하겠다. 이런 도치와 전도(顚倒)가 문학인들만의 자화상은 아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했을 때 ‘맞습니다. 우리 선친(혹은 스승)이 씻을 수 없는 민족반역의 잘못을 저질렀습니다’라고 인정한 경우는 없었다. 사회에 끼친 공로가 지대하다는 궤변으로 과오는 낯부끄러운 한순간 실수가 되었다. 매국이 결과적 애국으로 둔갑하는 기이한 우리 현대사야말로 누구나 아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런데 실제론 까맣게 모르는 것이다. 모르도록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다. 목사인 내가 내 설교의 출처를 모르듯. 그때부턴 어쩔 수 없음일 리도 한때의 실수일 리도 없는 것이다.

미당이 돌아간 다음 해 해외유학생 수련회에서 한 미술가로부터 이 대(大)시인이 죽기 전 세례를 받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평생 불교적 사상으로 일관했음에도 말년의 미당은 우주로부터 교신이 왔다거나 정보기관이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는 섬망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때 외국에 있던 자녀가 미당을 전도해 마지막에 어느 유명 목사님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거였다. 그가 불교를 버리고 기독교도가 돼 최후의 두려움에서 벗어났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장례 때문에 논란이 있었다고 했다. 개신교식으로 치러야 했으나 세간을 의식해 어쩔 수 없이 표면적으로만 불교식으로 했다는 것이다.

나는 ‘과연 미당이로군’ 하는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기독교도로서 숭고한 내 양심은 인간의 끝내 비루한 비굴함과 그에 대한 얄미움으로 사소하게도 편안치 못했다. 그 비루함은 내 안의 비굴함이고 나는 내 안의 비굴함을 미워했던 것인지 모른다. ‘그는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던 새파랗게 젊은 날로부터 그럴 필요가 없어져 국민시인으로 칭송받고 많은 젊은이들의 스승이 된 후에도 여전히 비굴하게 처신했다. 여자가 화장으로 아름다워지지 않듯이 문장이 미문(美文)으로 아름다워지는 게 아니다. 어떤 인간이 하느냐에 따라서 말의 의미와 가치는 결정된다.’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정죄했던 것이다. 이것은 미당과도 상관이 없기에 떳떳이 말할 수 있다.

미당문학상을 비롯한 친일문인기념상 폐지 주장이 단지 긴 예술에 대한 짧은 정치의 공세가 아니라 짧은 정치의 저항에 대한 긴 예술의 설교로 인식되려면 어디서부터 출발해야 할까. 한번은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고전 10:1)’ 세례를 받는 일대변혁으로 더 이상 비루하고 구차한 말들의 영향력이 그칠 것인가? 지금이 마지막 기로일 것만 같다.

천정근(안양 자유인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