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채수일] 증오에 대하여

입력 2017-08-24 18:22

얼마 전 일본 오사카를 방문했습니다. 오사카에서 가장 오래된 한인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극우 일본인들이 ‘증오연설’을 하는 것을 봤습니다. 한·일 관계가 나빠지면 더 기승을 부린다는 극우파 일본인의 발언 내용만이 아니라, 그들의 표정은 더 섬뜩했습니다. 증오연설은 특정한 개인 혹은 집단에 대한 편견과 폭력을 부추길 목적으로 그들을 폄하하고 위협하고 선동하는 행위입니다. 증오는 특정 음식, 신체분비물, 동물, 특정 성적 행위, 피부 및 신체 표면의 손상, 불결한 위생상태, 불쾌한 사람과의 접촉, 도덕적 과오 등에서 일어나는 혐오와는 다릅니다. 대부분 개인적 반응인 혐오와 달리 증오는 개인적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집단적 차원에서 일어납니다. 특정 집단에 대한 이런 증오는 반유대주의에서부터 나치즘, 인종주의, 이슬람 포비아, 테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발전해 왔습니다. 2011년 노르웨이에서 77명을 살해한 브레이비크, 2016년 미국 올랜도의 게이 나이트클럽에서 49명을 살해한 오마르 마틴 사건을 비롯해 최근까지 끊임없이 일어나는 테러들도 목적만 다를 뿐 증오의 극단적 표출 형태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증오폭력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요. 나치의 선전장관이었던 파울 괴벨스가 ‘분노와 증오는 대중을 열광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고 말했듯이 증오는 두려움을 조장하고 대중적 지지를 기반으로 정치적 목적을 관철하는 효과적인 수단일지 모릅니다. 그는 유대인에 대한 분노와 증오를 조장하여 600만명의 유대인을 학살했습니다. 그는 이런 말도 했습니다. ‘선동은 한 문장으로 가능하지만, 그것을 반박하려면 수십장의 증거와 문서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반박하려고 할 때는 이미 사람들은 선동되어 있다.’ 유대인들이 탄압받고, 재산을 몰수당하고, 수용소로 잡혀가 강제노동에 시달리고, 가스실에서 죽어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수많은 독일인들이 침묵을 지킨 이유, 그들이 이미 선동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라디오와 신문과 영화의 시대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른바 SNS 시대의 증오는 더 치명적입니다. 거짓말과 선동의 빠른 확산과 확대재생산이 익명성의 가면 뒤에서 더욱 강화되기 때문입니다.

증오는 극우파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좌파나 우파, 진보나 보수를 넘어서 모든 극단적 행위의 배후에는 드러난 혹은 드러나지 않은 증오가 있습니다. 한국사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얼마 전 4성 장군의 ‘갑질’ 사건이 있었습니다. 물론 법을 어겼거나 규정을 넘어서 타인에게 갑질을 한 것은 비난받아 마땅하지요. 그러나 평생을 군인으로 살아온 4성 장군의 실명과 얼굴을 공개하고, 그의 가족까지 난타하는 것은 아무리 국민의 알권리를 존중한다고 해도 피의자의 인권과 명예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갖추지 않은 행태였습니다.

어디 우리 사회 안에서만 그런가요. 더 심각한 것은 교회 안의 증오 행태입니다. 교회가 선포하는 교리(원수를 사랑하라)대로 행동하는 것도 아니고, 교인이 가르침대로 실천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 뭐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지만, 한국교회 그것도 소위 진보적인 교회의 진보적인 교역자나 신도들이 보여주는 증오 행태가 전투적 근본주의자들 못지않은 것이 더 걱정입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문학비평가였던 시릴 코널리는 ‘두려움 없는 증오는 없다. 우리는 자신이 두려워하는 존재를 증오한다. 따라서 증오가 있는 곳에는 두려움이 숨어 있다’고 말했는데, 증오는 두려움의 쌍둥이인 셈이지요. 그러므로 증오하는 사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증오에 증오로 대응할 필요도 없습니다. 상대가 두려워서, 혹은 시기심에서 증오하는 사람은 자신의 증오로 이미 파괴된 사람입니다. 성서는 두려움을 내쫓는 완전한 사랑(요일 4:18)에 대한 담대한 믿음이 증오를 이길 수 있다(히 13:6)고 합니다. 비록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님이 함께 하시면 그리스도인에게 두려움은 있을 수 없습니다(시 23).

채수일 경동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