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젠트리 보고서] 상권 잔혹사? 손잡으면 길이 보입니다, 성수동처럼

입력 2017-08-23 05:03
정원오 성동구청장(왼쪽)이 21일 오후 상생협약, 프랜차이즈 입점 제한 등 젠트리피케이션 방지 대책을 집중적으로 쏟아 붓고 있는 서울 성동구 성수1가2동 서울숲길을 방문해 아동복 매장을 운영하는 부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병주 기자
성동구가 성수1가2동 건물주들과 체결한 상생협약서.
“저기 식당 보이시죠? 저기 월세가 올해 26% 올랐어요. 건물주가 좀 나빠요.”

지난 21일 오후 서울 성동구 서울숲길. 성동구청의 강형구 지속발전과장이 건물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는 이 동네 건물들의 주인과 임차인 사정을 속속들이 꿰고 있었다. 그의 소개로 요즘 건물주와 임대료 갈등을 겪고 있다는 한 사진관을 방문했다.

“지난해 건물주가 바뀌고 나서 1층부터 다 나가라고 했어요. 6개월 만에 3층까지 모두 나가고 새 가게들이 들어왔죠. 1층 가게 임대료는 90만원 했었는데 갑자기 280만원으로 뛰었어요. 나도 월세 50만원을 내고 있는데 80만원으로 올려달라고 하는데 임대차 보호기간을 무기로 버티고 있죠.”

5년간의 상가 임대차 보호기간에는 임대료 인상률 한도가 9%로 설정돼 있다. 사진가 H씨는 2013년부터 이 건물 한 칸을 빌려 사진관을 하고 있다. 그는 “여기 와서 주변의 공방 주인, 사회적기업가, 예술가 등 10명이 같이 프리마켓을 시작했는데 지금은 다 떠나고 4명만 남았다”면서 “내년이면 이 가게도 임대차 보호기간이 끝나는데 그 다음엔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동네가 유명해지면 임대료가 오르고 거기서 오랫동안 터 잡고 살아오던 주민들과 상인들이 쫓겨나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하 젠트리)의 비극이 서울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서울에서 가장 뜨는 동네 중 하나인 성수동도 예외가 아니다. 다만 이 동네엔 희망이 싹트고 있다. 성동구청이 젠트리를 막기 위해 총력전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성동구는 최근 성수1가2동에서 올 상반기 임대료 갱신 계약을 한 78개 업체 중 60곳에서 임대료를 동결했다고 발표했다. 또 78개 업체의 평균 임대료 인상률을 잡아보니 지난해 17.6%였던 것이 올 상반기 3.7%로 뚝 떨어졌다. 서울숲길 일대도 지난해 임대료 인상률이 평균 19.3%였지만 올 상반기에는 6.0%에 그친 것으로 나타났다.

성수1가2동의 사례는 갈수록 악화되는 젠트리 현상 속에서 돌출한 최초의 반전이다. 정책으로 임대료 상승을 억제하는 게 가능하다는 걸 처음으로 보여준 사례이기도 하다. 비결은 상생협약이었다.

성동구는 지난해 1월 젠트리 전담부서인 ‘지속발전과’를 신설하고, 도시재생이 시작되는 성수1가2동을 상대로 구청과 건물주, 임차인 간 임대료 인상률 상한선을 준수할 것 등을 약속하는 상생협약을 체결하는데 주력해 왔다. 공무원들이 상가건물을 하나씩 맡아 설득했고, 건물주 상대로 지금까지 18차례 협조 요청 공문을 보냈다. 1년6개월 만에 성수1가2동 건물주의 62%가 협약에 동참했다.

강 과장은 “구청 간섭이 너무 심하다, 재산권 침해 아니냐, 이런 식으로 반발도 많았다”면서 “구청으로서는 임대료가 안정돼야 상권이 오래 갈 수 있다는 논리로 꾸준히 설득하는 수밖에 없었다”고 과정을 설명했다.

성동구는 상생협약을 이끌어내기 위해 용적률 완화 등 인센티브를 제시했다. 또 일부 부동산중개업자들이 건물주를 부추겨 임대료 상승을 불러일으키는 경우도 있다고 보고 관내 부동산중개업소를 대상으로 상생교육을 실시하기도 했다.

성동구는 올해 또 다른 젠트리 정책을 선보였다. 주변 시세의 60∼70% 정도의 임대료를 내고 맘 편히 장사할 수 있는 구청 직영의 ‘안심상가’를 조성하는 중이다. 광나루로에 상가를 매입해 임대료 상승으로 밀려난 상인들이 입주할 수 있는 2년 계약의 단기안심상가를 만들었고, 성수역 인근에 빌딩 한 채를 확보해서 최대 10년까지 임대해주는 장기안심상가도 만들어 내년 초부터 운영한다. 지식산업센터(아파트형 공장) 6곳에도 기부채납 방식으로 1층에 장기안심상가를 조성할 계획이다. 성동구는 안심상가가 쫓겨난 상인들에게 의지할 곳이 되어주고, 주변 상가에 임대료 인상 가이드라인 역할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서울숲길에서는 이달부터 대기업 상점과 프랜차이즈 상점 입점 제한조치가 시행됐다. 서촌이나 명동 등 도심부를 제외하고 서울에서 대기업 입점을 제한한 곳은 성동구가 처음이다. 성동구는 재산권 제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프랜차이즈가 지역 임대료 상승의 주범 중 하나라며 규제를 강행했다.

성동구에서 2015년 초 시작된 젠트리와의 싸움은 한국형 젠트리 대책으로 주목을 받으면서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서울시는 성동구의 상생협약, 젠트리 조례 등을 참고해 2015년 12월 ‘서울시 젠트리피케이션 종합대책’을 내놓았다. 문재인 대통령의 100대 국정과제에도 젠트리 대책이 포함됐다. 국토교통부는 최근 안심상가와 비슷한 공공임대상가를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글=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 사진=이병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