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란을 낳기 위해 기르는 닭(산란계)은 평생을 ‘배터리 케이지(Battery Cage)’에서 보낸다. 닭 한 마리가 차지하는 공간은 가로 20㎝, 세로 25㎝. A4용지 한 장보다 작다. 철창 사이에는 모이와 물을 먹기 위해 머리를 빼꼼히 내밀 구멍만 나 있다. 살충제 계란 사태를 낳은 공장식 축산의 모습이다.
16일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국내 산란계 농가 1464곳 중 동물복지 인증을 받은 92곳을 제외한 약 94%의 농가가 배터리 케이지를 사용하고 있다. 친환경 인증을 받은 농장도 항생제나 성장촉진제를 쓰지 않을 뿐 대부분 배터리 케이지를 사용한다.
경남 합천에서 9년째 친환경 농법으로 유정란을 생산하고 있는 애향교회 주영환(52) 목사는 “방생하는 닭은 충분히 흙목욕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진드기를 털어낼 수 있는데 밀집된 닭장에서는 불가능하다”며 “케이지 사육 농가들은 살충제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살충제 살포가 반복되면 해충에도 면역이 생긴다. 피프로닐처럼 승인 받지 않은 살충제까지 등장한 이유다. 김재홍 서울대 수의학과 교수는 “허가된 약품에는 내성이 생겨 효과가 별로 없으니 더 강한 약을 찾게 되는 악순환이 빚어진다”고 지적했다.
무더운 날씨도 진드기 급증에 한몫했다. 기온이 높아지면 해충의 성장속도도 빨라져 피해가 커진다. 배터리 케이지가 닭진드기에게 최적의 환경을 제공한 셈이다.
전문가들은 배터리 케이지를 금지하는 게 문제 해결의 첫걸음이라고 강조했다. 닭이 덜 밀집된 공간에서 지내면 진드기도 줄고 닭도 좀 더 건강해진다. 유럽연합(EU)의 경우 2003년부터 배터리 케이지 신축을 금지했다. 2012년부터는 아예 기존 농가에서도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한국은 갈 길이 멀다. 정부는 지난 4월 조류인플루엔자(AI) 대책의 일환으로 산란계 1마리당 최소 사육면적을 0.05㎡에서 유럽 수준인 0.075㎡로 늘리겠다고 발표했지만 아직 관련법 개정 작업은 시작도 하지 못했다. 동물자유연대 강정미 간사는 “완전 방목이 아니더라도 닭이 어느 정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개방형 사육 시스템 같은 절충적 방안이 있다”며 “배터리 케이지는 금지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근본적으로는 축산업 자체를 동물복지와 같은 방향으로 틀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배터리 케이지를 금지한 유럽에서도 살충제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김재홍 교수는 “한국보다 조금 나은 형태일 뿐 유럽도 완전히 밀집사육에서 벗어났다고는 볼 수 없다”고 말했다.
동물복지를 강조하면 축산농가가 어려워진다는 인식도 재고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구제역이나 AI 같은 전염병을 해결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을 고려하면 공장형 축산이 경제적인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난해 미국에선 월마트와 맥도날드, 스타벅스 등이 2025년까지 판매하는 계란을 모두 방목사육 방식(cage-free) 계란으로 바꾸겠다고 선언했다.
동물보호시민단체 카라의 전진경 상임이사는 “여태껏 동물의 고통을 담보로 계란을 싼값에 먹었던 것이 부메랑으로 돌아왔다”며 “살충제 계란 같은 식품안전 문제는 동물의 생태를 존중하며 키웠으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배터리 케이지
Battery Cage·닭 한 마리가 겨우 들어가는 철제 닭장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모습이 건전지와 비슷해 붙은 이름. 공장식 축산을 하는 농가에서 배터리 케이지를 쌓아 놓고 닭을 기른다.
임주언 이재연 기자, 합천=이영재 기자 eon@kmib.co.kr, 사진=최종학 선임기자, 그래픽=안지나 기자
[투데이 포커스] ‘한뼘 닭장’이 낳은 ‘살충제 달걀’… 밀집사육의 부메랑
입력 2017-08-17 0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