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폭력은 사랑의 언어로 행해진다. 사랑하니까 간섭하고 교육하기 위해 통제한다는 식이다. 특히 이런 위선의 언어는 가정폭력을 정당화하는 방편으로 자주 등장한다. 정체성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치는 가정에서의 폭력이 남긴 상처는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다. 상처는 문신처럼 남아 어느 순간 불쑥불쑥 떠올라 옭아맨다.
지난 9일 연극제 권리장전2017 ‘국가본색’의 포문을 연 작품 ‘문신’은 가정에서 벌어지는 근친강간과 이를 함구하는 분위기를 고발했다. 가족 위에 군림하는 아빠와 침묵으로 일관하는 엄마, 첫째 딸 아니타, 여동생 룰루의 이야기다. 독일 작가 데아 로어가 1992년 실화를 바탕으로 쓴 작품으로 백순원이 연출을 맡았다.
극 중 아빠는 딸들을 철저히 통제하고 세뇌한다. 평범한 아이들처럼 친구를 만나거나 연애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의 말만 듣길 바라고 통제 안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을 “사랑받는 길”이라 가르친다. 아빠는 “무엇을 듣던 거짓말”이라며 “말보다는 경청하고 대꾸하지 말라”고 복종할 수밖에 없게끔 훈련한다.
주요 희생양인 아니타는 아빠의 성폭행, 세상과 단절된 삶에 혼란을 느낀다. 그러던 중 꽃집 남자 파울을 만나 조금씩 달라진다. 파울과 나가 살겠다는 아니타의 전격 발표에 가족들은 완강히 반대한다. 아빠는 “너를 위해 평생 산 보답이 이것이냐”며 “화목한 가정을 깨뜨리지 말라”고 윽박지른다. 그러면서 딸의 성장과 결혼 선고를 “배신”이라고 몰아세운다. 딸의 고통을 모른 척하던 엄마와 동생 룰루도 “날 버리는 것이냐”며 막아선다.
결국 아니타는 파울과 나가 살게 되지만 아빠의 그늘에선 영영 벗어나지 못한다. 집에서 탈출해 폭력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자유로워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몸속 깊숙이 시나브로 뿌리박혀 알아차리지 못했던 공포와 불안의 문신을 비로소 발견한 것이다. 아니타는 새장 문을 열어줘도 하늘로 훨훨 날아가지 못하는 새처럼 스스로를 가뒀다.
작품은 가정폭력이든 국가의 폭력이든 모든 폭력은 본질적으로 같다는 것을 보여준다. 모든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는 전제가 있어 가능한 해석이다. 마치 국가를 운영하는 정치 권력자가 시민을 상대로 폭력을 행사하고 기만하는 방식과 가장이 다른 구성원에게 폭력을 가할 때 방식에 차이가 없다고 외치는 느낌이었다. 아빠의 검열과 통제, 위선, 엄마와 룰루의 침묵은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과 댓글 조작사건 등을 떠올리게 했다.
권리장전2017 ‘국가본색’은 매주 다른 연극을 통해 국정농단 사건과 탄핵정국을 겪은 한국 사회에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단지 국가에만 집착하지 않고 감옥, 병원, 장례식장 등 각기 다른 일상에서 권력자의 영향력 행사가 국가의 폭력과 얼마나 닮았는지 보여준다. 오는 12월 31일까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 연우소극장 등. 1만원.
권준협 기자 gaon@kmib.co.kr
“가정과 국가의 폭력, 본질적으로 같다”… 연극 ‘문신’ 리뷰
입력 2017-08-14 0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