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게 말하면 프리랜서, 나쁘게 말하면 임시직이다. 10년이나 다녔던 멀쩡한 대기업을 그만둔 A씨는 ‘이것저것 잡스러운 일’을 한다. 스스로 그렇게 말한다. 마케팅, 컨설팅, 홍보 등을 두루 하는 회사의 대표이지만 직원은 없다. 일감을 계약하면 그때그때 맞춤한 직원을 채용한다. 사장도 임시직, 직원도 임시직이다. “물론 대기업 다닐 때랑 비교하면 벌이가 절반 수준이죠. 그런데 어차피 평생직장, 온갖 혜택을 주는 안정적인 정규직 일자리는 사라지고 있어요. 미래를 미리 대비하고 있는 셈입니다.”
A씨는 그나마 행복한 편이다. 대부분의 임시직 일자리는 여전히 수입이 박하고, 처우는 나쁘며, 대접은 바닥이다. 세계적으로 임시직 일자리는 빠른 속도로 늘고 있다. 이른바 ‘긱 이코노미(Gig Economy·임시직 경제)’가 그것이다.
‘긱’은 1920년대 미국에서 재즈공연이 있을 때마다 공연장 주변에서 연주자를 단기 채용하던 데서 비롯한 단어다. 그때그때 필요한 인력을 일정기간에만 고용하는 게 긱 이코노미다. 차량·숙박 등에서 시작한 긱 이코노미는 배달, 청소 등 여러 단순노동 서비스로 확장됐다. 최근에는 변호사, 컨설턴트, 의사 등 전문인력이 참여하는 서비스로 번지고 있다. 맥킨지는 긱 이코노미의 부가가치가 2025년까지 글로벌 국내총생산(GDP)의 2%(약 2조7000억 달러)에 이르고, 약 5억4000명의 인구가 혜택을 입을 것으로 내다본다.
하지만 긱 이코노미의 그림자는 아직 짙고 어둡다. 질 낮은 일자리를 양산하고, 고용 안정성을 해치며, 임금 상승을 둔화시켜 경제의 발목을 잡는다. 소득 양극화라는 덫에 빠질 가능성도 크다. 더욱이 긱 이코노미가 4차 산업혁명을 만나면서 ‘일자리 파괴’ ‘일자리 뺏기’에 엄청난 폭발력을 더하고 있다. 노동시장을 뿌리부터 뒤집으면서 수많은 ‘긱’을 만든다. 우려는 이미 현실로 다가왔다. 자동차업계는 정보통신기술(ICT)을 기반으로 하는 ‘스마트 공장’으로 빠르게 변신 중이다. 일본 자동차업계는 근로자 1만명당 로봇 1414대, 독일은 1149대, 미국은 1141대를 배치하고 있다. 우리도 1129대의 로봇이 자동차 생산라인에 자리 잡았다. 여기에 AI, 사물인터넷(IoT) 등이 맞물리면 인간의 노동력은 거의 필요 없는 공장이 된다. 자동차뿐만 아니라 상당수 제조업체 공장에서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어질 것이다. 10년쯤 지나면 로봇이 인간의 일자리 가운데 70%를 대체한다는 우울한 예측도 나온다.
물론 4차 산업혁명, 로봇과 AI가 이제껏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 인류 역사에서 기술의 발전은 생산 방식의 혁신, 생산량의 증대를 가져다줬다. 인류를 지독한 가난과 기아, 혹독한 노동에서 구원해왔다. 다만 앞으로 벌어질 파괴와 창조의 과정에서 발생할 충격파는 예측불허다. AI와 로봇의 ‘대체 노동’은 인간에게 ‘노동으로부터의 자유’를 주겠지만 동시에 ‘노동가치의 소멸’을 불러온다. 일을 해서 재화를 생산하고, 그 재화로 일상을 꾸리는 삶의 방식은 용도 폐기될 운명 앞에 놓였다. 이 때문에 주요 국가에선 새로운 사회안전망 구축을 위한 ‘로봇세’(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는 로봇의 노동에 매기는 세금)와 ‘기본소득’(인간다운 삶을 누리도록 조건 없이 지급하는 소득) 논쟁이 뜨겁다.
우리라고 이 물결을 비켜갈 수 없다. 우리 산업계는 생산 자동화, 스마트 공장 등을 빠른 속도로 받아들이고 있다. 한국고용정보원은 AI와 로봇 기술의 발전이 국내에서 10년 안에 1800만명 넘는 사람의 일자리를 위협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그래서 국가의 역할이 중요하다. ‘충격파’가 어느 정도의 세기로 우리를 덮칠지, 그걸 상쇄할 ‘방파제’를 어떻게 만들지 논의·합의할 수 있는 멍석을 하루라도 빨리 깔아야 한다. 인간이 빠진 기술 발전, 경제 성장과 번영은 허깨비일 뿐이다.
김찬희 경제부 차장 chkim@kmib.co.kr
[뉴스룸에서-김찬희] 긱 이코노미
입력 2017-08-06 1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