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답하고 힘들면 ‘홍반장 안드레이’ 찾으세요

입력 2017-08-07 00:00 수정 2017-08-07 15:54
안드레이 리트비노프 전도사(왼쪽)가 최근 광주 북구의 한 공원에서 부인 김주실씨, 4남매와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고려FM’ 방송을 진행하고 있는 안드레이 리트비노프 전도사.
광주 고려인마을 지역아동센터를 찾은 고려인 아동과 함께한 리트비노프 전도사.
지난달 말 광주 광산구에 위치한 새날학교를 찾았다. 다문화가정 청소년을 위한 대안학교인 이곳에 ‘벽안의 백인 선교사’가 있다는 소식을 접해서였다. 교정 운동장에는 푸른 눈의 어른이 체육수업을 받는 아이들에게 또렷한 한국말로 “이리로 이리로”를 외치고 있었다. 우크라이나에서 온 안드레이 리트비노프(33) 전도사. 그는 고국에서 10년 동안이나 한국어 통역사로 일했다. 대부분이 정교회 신자인 우크라이나에서 지극히 소수에 불과한 개신교도였다. 고려인 선교에 나섰던 이 학교 교장 이천영 목사를 알게 되면서 리트비노프 전도사의 인생이 바뀌었다.

이 목사는 러시아에서 고국을 찾아 이주해온 ‘고려인’이 많은 광주에 고려인 자녀 등을 위한 대안학교를 창설했고, 우크라이나에서 온 그를 떠올렸다. 7년 전 이 목사는 리트비노프 전도사를 초청했고, 그는 이 학교에서 영어와 러시아어를 가르치고 체육 수업도 하는 ‘만능 교사’가 됐다.

리트비노프 전도사는 이 지역에 사는 고려인들에게 ‘홍반장 안드레이’로 불린다. 오랜 러시아 생활로 한국어는 물론 고국의 생활방식에 적응하지 못하는 고려인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어김없이 그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영화 ‘홍반장’의 주인공처럼 해결 못하는 게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리트비노프 전도사는 고려인마을 지역아동센터 소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러시아어가 익숙한 고려인 부모와 한국어만 쓰는 학교 친구들 사이에서 ‘문화적 갈등’을 겪으며 소외된 고려인 가정 출신 청소년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듬고 있다.

“고려인 부모들은 생계를 위해 밤낮없이 일하러 나가 있어요. 그러니 아이들은 방치되기 십상이죠. 어린 나이에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는 애들도 많고, 외로움과 소외감을 못 견뎌 자살을 시도하는 경우도 적지 않아요. 이들을 정성을 다해 돌보고 고려인도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실감나게 만드는 게 제 사명입니다.”

그는 유창한 한국어로 “아이들에게 가장 해주고 싶은 말이 ‘위축되지 말고 항상 긍정적인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라고 했다. 고국을 찾아 이주해온 고려인 스스로 ‘외국인’이라 여기는 사고방식을 깨고 세상 밖으로 나오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리트비노프 전도사는 한때 권투선수였다. 우크라이나 국가대표 선수가 될 수도 있었다. 2001년 경기 후 편파판정을 항의하는 과정에서 심판의 몸을 밀쳤고, 그는 협회로부터 제명처분을 받았다. 실망이 컸다. 방황하다 자살까지 시도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버리시지 않으셨다. 주위에서 권하던 교회에 출석하게 됐고, 하나님앞에 무릎을 꿇었다. 기도에 매달리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수 1:5∼9)

그는 우크라이나 영산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전도사가 됐다. 한국인 신학교수에게 한국어를 배워 한국어 전문통역사가 됐다. 그러다 우크라이나에 단기선교를 온 김주실(31)씨를 만나 결혼했고 한국행을 택했다.

지난해 9월 문을 연 ‘고려FM’ 진행자이기도 하다. 러시아어와 한국어로 하루 4시간 이상 마을소식과 의료, 구직 정보, 한국에서 겪은 고려인의 애환을 들려준다. 중병에도 병원비를 마련하지 못한 고려인 동포 사연을 알려 치료를 받게 했다.

틈날 때마다 복음을 전한다. 찬양을 가르치고 아이들과 새벽기도, 성경공부를 하고 노방전도 활동을 펼친다. 선교사가 되겠다는 아이들이 줄을 잇는다고 한다. 리트비노프 선교사의 기도제목은 ‘교만하지 않고, 아픔을 간직한 고려인들에게 도움을 주고 행복한 전도인이 되겠다’는 것이다.

■고려인, 그들은 누구인가

‘고려인’이란 러시아로 이주한 우리 민족을 통칭하는 단어다. 이들이 러시아로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1860년대 무렵부터였다. 농민 13세대가 한겨울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 우수리 강 유역에 정착했다. 이어 1865년에 60가구, 그 다음해에 100여 가구, 1869년엔 4500여명이 이주했다. 이주는 계속됐고 대부분이 농업이민이었다. 이들이 살던 지역은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망명 근거지가 됐다.

구(舊) 소련 스탈린정권은 1937년 고려인을 중앙아시아와 동유럽 지역으로 강제이주시켰다. 소련 영토 내 소수민족 전체에 대한 강제이주정책에 따른 것이었다. 민족주의 운동을 차단하고 공산주의 집단경제체제를 도모하기 위한 책략이었다.

지식인들은 처형했고, 화물차에 짐짝처럼 고려인들을 실어 시베리아의 매서운 삭풍 속에 아무 곳에나 떨궈버렸다. 고려인은 살기 위해 황무지를 개척했고 중앙아시아를 비옥한 옥토로 가꿨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또 다른 시련이 찾아왔다. 독립된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민족주의 정책을 펴면서 고려인은 그곳에서도 이방인 신세로 전락했다. 현재 고려인은 러시아와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키르기스스탄 우크라이나 몰도바 등지에 50만여명이 거주하고 있다.

‘영원한’ 이방인의 설움을 안은 이들 가운데 4만명 정도가 귀국해 국내에 정착해 있다. 이 가운데 광주 광산구 평동로 일대는 4000명 가량이 거주하는 고려인마을 공동체가 자리잡고 있다. 한국교회는 모국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고려인들을 위해 주거와 법률, 의료, 직장알선 등을 제공하고 있다. 양질의 지원사업이 입소문을 타면서 광주로 유입되는 고려인의 수가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고려인마을은 협동조합을 통해 상담소와 지역아동센터, 어린이집, 고려인센터, 고려인 마을 특화거리, 항공여행사, 고려FM 방송사 등을 운영한다.

광주새날학교 교장인 이천영 목사는 “올해는 18만여명의 고려인이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에 버려진지 80주년이 되는 해”라며 “고려인 강제이주 역사는 쓰디쓴 대한민국의 역사다. 쓰라린 아픔을 우리가 안아줘야 한다”고 말했다.

광주=글·사진 유영대 기자 ydy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