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증언과 증거, 그리고 증인

입력 2017-08-04 00:00

흔히 전도와 선교를 ‘복음에 대해 증언하는 행위’로 정의하면서 선교는 그 대상이 타문화권이라는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굳이 틀렸다고 비판할 건 아니지만 성경이 정말 복음에 대해 말(증언)하면 된다고 가르치는지 따져볼 필요는 있다. 전도나 선교를 어떻게 이해하고 그 개념을 어떻게 정의하는가에 따라 실천방식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장은 영원한 진리(로고스)가 인간으로 나타나신 그리스도에 대해 설명하는 문맥에서 요한이라는 인물을 등장시킨다. 그러면서 요한은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요 1:8)라고 말한다. 그리스도를 증거하도록 부름 받은 교회의 사명을 엿보게 하는 본문이다.

흥미롭게도 우리말로 번역된 성경들을 대조해보면 ‘증거’보다는 ‘증언’을 선택한 역본들이 더 많다. 증거와 증언을 동의어로 보았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아마도 전도를 복음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여긴 결과일 것이다.

증거는 증언을 포함하지만 보다 포괄적인 개념이다. 말은 증거의 중요한 기능이지만 증거란 언어뿐 아니라 비언어를 포함한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언어 외적인 사랑의 증거가 병행돼야 사랑의 진정성이 증명되는 것과 같다.

현학적 문구로 사랑을 묘사하거나 심지어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바울의 경고(고전 13:1)가 우리의 전도와 선교의 관행을 재고하도록 요구한다.

사실 성경은 증거나 증언이라는 행위보다 ‘증인’이란 존재에 초점을 맞춘다(사 43:10, 눅 24:48, 행 1:8). 앞서 인용한 세례요한의 경우도 우리말 성경은 대부분 증거 행위(‘증거하러’ 또는 ‘증언하러’)로 번역했지만, 헬라어 원문은 ‘증인으로’ 보내심을 받았다는 의미다.

물론 그는 복음에 대해 말하고 증거할 것이다. 하지만 증거행위 자체보다 증인 됨에 초점을 맞추는 게 매우 중요하다. 증인이라면 당연히 증거 행위의 열매를 맺겠지만, 증인이 아닌데 증거 행위에 집착하면 바리새적 위선을 초래할 것이다. 2년마다 한국에서 열리는 선교한국대회가 2012년 대회 주제를 ‘우리가 이 일의 증인이라’는 다소 진부해보이는 표어를 선택하고 젊은 헌신자들의 선교행위보다 ‘선교적 존재’로 관점을 전환한 이유이기도 하다.

증인이라는 개념은 복음 증거의 효과 및 장애 요인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증언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증언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효과적이고 전략적인 증거행위보다 증인의 자질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오른손이 하는 선행을 왼손이 모르도록 아무리 숨겨도 결국 드러나고 마는 ‘산 위의 동네’(마 5:14)를 보지 않은 채 시끄러운 확성기 소리만으로는 세상이 감동하거나 변할 수 없다. 어느 불교 지도자가 그에게 전도하려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다. “나는 귀는 들리지 않지만 볼 수는 있다오.” 그리스도께서 성육하셔서 세상에 진리를 드러내신 것처럼, 우리는 세상에게 복음을 들려줄 뿐 아니라 보여줘야 한다. 복음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우리의 존재와 삶으로 복음을 담아내야 한다.

선교적 노력이 통전적 진리와 무관한 종교적 열심으로만 대치되는 것은 대단히 우려할 만한 현상이다. 기독교는 진리의 종교이다. 전도와 선교가 진실성이나 소통 없는 일방적 선전이나 신비주의적 종교 행위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진리는 반드시 선포돼야 하지만 그 메시지에 증인의 인격을 실어야 한다. 전도가 힘을 받는 것은 증인의 삶 전체가 담긴 통전성에 달려있고, 메시지(증거)의 신뢰도는 메신저(증인)의 신뢰도가 결정하기 때문이다.

정민영(성경번역선교회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