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체’에 주눅 든 채무자, ‘빚 독촉 공포’ 벗어난다

입력 2017-08-01 05:00
최종구 금융위원장(오른쪽)이 31일 서울 중구 서민금융진흥원에서 금융업권별 협회장, 금융공공기관장과 간담회를 갖고 소멸시효 완성채권 처리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금융위원회 제공
A씨는 최근 법원으로부터 지급명령 통지를 받았다. 18년 전 연체한 뒤 내버려 둔 카드빚 때문이었다. B대부업체가 A씨의 소멸시효가 지난 채권(소멸시효 완성채권) 등을 한꺼번에 사들인 뒤 법원 전자소송시스템으로 지급명령이 실시되도록 한 것이다. A씨는 당황했지만 오래전 빚 때문에 별일 있을까 싶어 아무 조치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2주 뒤 B대부업체로부터 본격적인 빚 독촉이 시작됐다. 법원 지급명령 후 이의신청 기간(2주)이 지나면서 채권 소멸시효가 10년 연장됐기 때문이다.

금융위원회는 A씨 같은 피해사례가 없도록 소멸시효 완성채권을 일괄 소각해 채무자 부담을 완전 해소할 계획이다. 당장 국민행복기금과 금융공공기관에서 보유한 소멸시효 완성채권의 채무자 123만1000명이 ‘빚의 굴레’에서 해방된다.

채권을 소각하면 시효 연장에 따른 추심 재발생을 원천적으로 막을 수 있다. 그동안 대부업체 등 금융회사는 소멸시효 완성채권을 대량 사들인 뒤 시효 연장 조치를 취해 빚을 받아낸다고 비난을 받아왔다. 현행법상 금융채권의 소멸시효는 5년이다. 제윤경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따르면 지난 3월 기준으로 금융권이 보유한 특수채권 약 20조1542억원 가운데 8조2085억원은 금융회사 소송 등으로 소멸시효가 1회 이상 연장됐다. 금융 당국은 이런 금융회사와 채무자 간 ‘숨바꼭질’이 무의미하고 비생산적이라고 본다.

채권 소각은 기관별로 이사회의 채권포기 의사결정, 전산 삭제, 서류 폐기 등 절차로 진행된다. 완제증명서까지 발급돼 채무 때문에 겪었던 금융거래 관련 불편도 해소된다. 채무자들은 9월 1일부터 채무 소각 여부를 신용정보원 소각채권 통합조회 시스템(kcredit.or.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상속인인 경우 상속포기나 한정승인을 받지 않아도 돼 법적 절차에 따른 비용 부담이 낮아진다. 기존에는 부모가 남긴 빚을 갚아야 하는지, 소멸시효가 완성됐는지 등을 알 수 없어 상속포기나 한정승인을 받아야 했다. 금융공공기관에서 보유하는 연체기록이 삭제돼 해당 기관 이용 시 채무자가 감수해야 했던 불이익도 사라진다. 전산원장에 ‘소멸시효 완성’이 아니라 ‘채무 없음’으로 표시되기 때문이다.

민간 금융회사에서 소멸시효 완성채권이 소각되면 오래 묵은 연체기록 때문에 대출, 할부 등 금융거래에 제한을 받는 일도 줄어든다. 금융위는 소멸시효 완성채권의 매각·추심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어 민간 금융회사의 채권 소각을 유도할 계획이다. 금융회사가 채무자의 상환능력 여부 평가 없이 법원 전자소송시스템 등으로 무분별하게 시효를 연장하던 관행도 고쳐나갈 방침이다.

금융 당국은 소멸시효 완성채권은 이미 채무자가 갚을 의무가 없는 채권이라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 논란과도 거리가 있다고 본다. 다만 향후 장기소액연체채권(10년 이상, 1000만원 미만) 소각 조치를 발표하면 다시 논란이 불붙을 수 있다. 금융위는 이달 중 장기소액연체채권 처리 방안을 발표할 계획이다.

글=조효석 기자 promene@kmib.co.kr, 그래픽=공희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