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전이다. 당시 연구년을 맞아 스위스와 독일의 경계에 있는 보덴 호숫가에 자리 잡은 교인 수 6000여명의 로만스호른교회 담임목회자로 초청받았다. 스위스 노동비자를 받기 위해 서류의 체류목적란에 ‘선교’라고 적었다. 담당 행정관은 무슨 뜻이냐고 되물으며 “선교는 19세기 리빙스턴이 아프리카에서 했던 것 아니냐”고 했다. 선교를 마치 구시대의 유물이나 특정한 사람들의 일로 생각했다. 이 행정관뿐 아니라 유럽인들이 보편적으로 이런 생각을 공유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독일의 신학자 에버하르트 융엘은 선교를 ‘교회의 심장박동’ 같다고 표현했다. 선교는 기독교 공동체가 ‘새 하늘과 새 땅(계 21:1)’을 향한 기다림 속에서 끊임없이 감당해야 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21세기의 선교는 이전까지와 달리 방법적 측면에서 많은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
기독교 공동체의 선교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에 근거한다. 이 개념은 스위스의 신학자 칼 바르트의 영향으로 스위스 바젤선교회장 칼 하르텐슈타인이 구체화했고 1952년 독일 빌링엔에서 열린 국제선교협의회 이후 전 세계적으로 확산됐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선 이 개념이 사회선교를 뜻하거나 진보적 교단에 국한된 구호처럼 왜곡돼 진정한 의미가 제대로 부각되지 못했다.
하나님의 선교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는 예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한다. 선교는 하나님, 인간, 자연 등의 삼중적 관계성 안에서 논의돼야 하는 포괄적 개념이다. 이는 21세기 선교가 인간 중심이 아니라 생명 중심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핵심은 인간을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의 기쁜 소식을 알리며 인간이 인간을 억압하고 인간이 자연을 억압하는 구조에서 벗어나도록 돕고 화해하는 사역이다. 선교란 곧 ‘우주적 구원’(골 1:20)을 계획하시는 하나님의 포용적 사역에 우리 모두 동참하는 것이다. 선교 사역은 전 세계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일, 교육, 의료 등 세 가지 축으로 전개됐다.
최근 우리나라는 공적개발원조(ODA)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이런 사업은 결코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선교 사역을 통해 오랫동안 지구촌 곳곳에서 이뤄져 왔기 때문이다. 물론 21세기에는 선교가 기독교 역사 안에서 이뤄온 순기능뿐 아니라, 역기능에 대해서도 비판적 성찰이 필요하고 여러 측면에서 변화도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각 지역 사람들을 선교나 원조의 객체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와 주체로 만나는 게 중요하다.
해당지역 문화와 그 문화의 실체가 되는 각 종교에 대한 이해를 증진하고 교회나 교파 간의 무분별한 경쟁이 아니라 연합과 협력의 차원에서 선교가 진행돼야 한다. 지속가능한 개발을 염두에 두지 못하고 근시안적 자선 형태의 원조만을 생각하는 한계를 극복하고 공적개발원조와 연계해 그 효율성을 증진시켜야 한다.
중부 유럽 국가들의 외무부 산하 국제협력단은 최근 종교가 개발도상국의 개발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 새롭게 주목하고 있다. 이웃종교 간 협력 없이는 세계가 직면한 수많은 갈등을 치유할 수도 없고 지속가능한 개발을 이뤄나갈 수도 없다는 교훈이 있었기 때문이다.
공적개발원조 기금의 중립적 특성상 종교에 대한 고려를 모두 배제했던 지난 세기의 접근법과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이제 우리도 이러한 맥락에서 선교의 한 축을 이루는 공적개발사업을 지속가능한 경제개발과 교육의 맥락에서 교회와 교회, 교회와 이웃종교 간 연합운동과 협력으로 풀어가야 한다. 이를 위해 19세기 미국식 개신교를 여과 없이 모방해 한국식 개신교를 다른 곳으로 이식하려는 1차원적 접근법에서 벗어나야 한다. 다차원적 협력을 통해 지구촌 곳곳의 갈등과 분쟁을 해결하는 데 동참해야 한다.
한국인들은 지난 세기에 받았던 사랑의 빚을 갚고 복음의 기쁜 소식을 나누고 싶어 한다. 이 선교열정이 하나님 정의의 빛에 비춰 공공선을 위해 더욱 효율적이며 역동적으로 구체화돼야 한다.
정미현 (연세대 교수)
[시온의 소리] 하나님의 선교
입력 2017-08-01 00:00